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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기지, 예술을 쏘아올리다
김원자
2009. 7. 23. 18:42
로켓기지, 예술을 쏘아올리다
- 미술 문화 산책2008/03/0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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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감자밭인가? 독일 뒤셀도르프의 작은 마을 노이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고요한 외곽에 망망대해 같은 밭이 펼쳐져 있다. 밭 사이에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지평선의 끝에 닿아 있다. 이곳에 미술관이 있다는데, 그것 참 거짓말 같다. 부지런히 지평선에 다다르면 다시 길이 이어지고, 오가는 차 하나 없는 도로를 넘고, 지키는 사람 없는 기찻길을 지나면 잠시 후 굽어진 길, 그러더니 하얀 콘크리트 벽이 떡하니 막아선다.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랑엔 부부 기념
낮지만 웅장해 보이는 원형의 콘크리트 벽이다. 벽의 한 부분에 사각의 통로가 있다. “이리로 오시게, 그럼 놀라게 해 주겠네!” 하는듯 통로는 근엄하게 유혹한다. 통로를 지나자마자 깜짝 놀란다. 인공 연못이 확 나타나고 그 끝에 사각의 유리박스가 가볍게 떠 있는 듯 섰다.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랑엔 재단 건물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은 꽁꽁 얼어 있다. 인공 연못은 건물로 다가가는 시간과 시각적 감성과의 대화를 극대화하면서 공감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 시작부터 방문객의 넋을 살짝 빼앗아 버리는 이런 진입법은 안도 다다오가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매번 알면서도 굴복당하지만 사실 건물 자체보다 이러한 중첩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진입의 시간에 더 매료된다.
건물은 직사각의 콘크리트 박스를 유리박스로 한 겹 더 둘러쌌다. 콘크리트는 커다란 유리상자 속에 담겨진 보석처럼 견고하고 우아하다. 안도 다다오는 쉽게 구할 수 있고 공사비가 적게 들면서도 큰 공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콘크리트가 우아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콘크리트 덩어리를 둘러싼 유리박스는 다다미 건축의 수평 모듈을 수직으로 입체화해 단조롭고 엄격한 형태에 운동감을 준다. 콘크리트 박스와 유리박스 사이는 자연스럽게 회랑이 형성된다. 그래서 주변의 넓은 농지들과 환영처럼 보이는 몇몇 공장 굴뚝의 희미한 실루엣들은 오히려 유리틀 속에 끼워진 회화처럼 보인다.
단층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사실 3층이다. 약 3미터가 외부에 드러나 있고 6미터는 지하에 박혀 있다. 내부로 들어가더라도 그 높이나 깊이감은 쉬 느껴지지 않는다. 완만한 경사로에 맞물린 공간들과 다양한 형태의 틈으로 흘러드는 태양빛들이 감각을 교란시킨다. 그 사이사이에 느린 간격을 두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걷다보면 나의 감성과 취향이 발걸음의 속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나의 속도를 제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랑엔 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수집했던 빅토르와 마리안 랑엔 부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소장품들은 랑엔 부부가 1950년대부터 수집한 것들이다. 12~20세기까지의 중요한 일본 작품이 500여 점, 세잔·워홀 등 20세기 서구 대가들의 작품이 300여 점에 이른다. 2004년에 개관했지만 94년 안도 다다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초기 아이디어가 만들어졌다. 그의 아이디어는 96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찬사를 받았고, 건축주였던 랑엔 부부도 그의 설계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계획이 실제로 시작되고 완공될 때까지 10년의 세월, 건물이 완성되기 몇 달 전 안타깝게도 마리안 랑엔은 92살로 숨을 거뒀다.
냉전의 사각지대에 몰려오는 예술가들
랑엔 파운데이션은 라케텐스테이션 구역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로켓 정거장(Raketen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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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직설적인 이름이 말하듯, 이 구역은 오랫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로켓 발사기지가 있던 냉전의 사각지대였다. 그 후 92년 나토와 옛소련 사이 무장해제 조약으로 유기된 이곳은 오랫동안 저주받은 들판으로 불렸다. 랑엔 파운데이션 뒤쪽에는 버려진 벙커들과 로켓 발사대, 격납고, 관제탑들이 남아있다. 지도상에도 표시되지 않았던 이땅에, 지금 화가와 조각가·작곡가·시인·문학가·과학자들이 모여든다. 꿈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노이스시는 이 일대를 예술과 문화와 과학, 그리고 자연을 위한 공동체, 더욱 확장된 문화센터로 만들고자 저렴한 실비로 작가들에게 분양했다.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의 주거용 아틀리에와 시인 토머스 클링의 집필실, 도서관, 그리고 생의학 국제연구소 등이 들어서 있다. 기존의 건물들을 정비해 나갔고, 쓰러져 가던 군용 창고는 콘서트홀로 개조됐으며, 곳곳에서 만나는 조각품들은 황폐한 군사기지를 대지예술의 마당으로 변화시켰다. 정기적인 음악회와 세미나나 심포지엄이 열리는 이곳에는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도 초대돼 강연했다고 한다.
라케텐스테이션의 맞은편 구역에는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이 있다. 홈브로이히는 200년이 넘도록 개간되지 않은 천연 생태공원이다. 그 야생의 땅에 지금 건물 18채가 쏙쏙 숨어 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면 덤불과 관목·연못·늪·초지·정글이 축축한 흙길로 연결됐다. 길이라 여겨지는 어느 곳으로 향하든 좋다. 이미 정해진,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동선은 없다. 걷다보면 덤불숲 속에서 사각의 벽돌집을 만나고, 연못 너머에 반짝거리는 온실을 만난다. 관목숲이 시작되는 초지의 경계에 떡하니 자리잡은 미로를 만나고, 늪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끝에서 갑자기 문 하나를 만나기도 한다. 건물은 건물인데, 도대체 건물 같지가 않다. 꼭, 조각품 같다.
건물이되 건물같지 않은, 조각품 같은 …
건물들은 모두 재생 벽돌로 지어졌고 매우 간결하다. 혼란도 긴장도 파편도 없는, 정직·엄격·명확·평온이 빈틈없이 꽉 짜인 것 같다. 내부는 자연채광과 흰벽이 만들어내는 빛으로 채워진 전시장이다. 작품들은 고대 크메르 조각에서부터 중국의 한·당·명대의 수집품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등의 민속품, 서구 근현대 대가들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국적을 아울러 방대하다. 그런데 이름도 설명도 전혀 없다. 시대·사조·지역 등으로 구분된 일반적인 미술관 디스플레이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작품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귀기울이라는 뜻이다.
허기지고 화장실과 쉴 장소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카페테리아가 나타난다. 공짜로 제공되는 빵과 감자, 과일을 잔뜩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곳에 대한 글을 읽는다. 이곳에서는 미술 전시 외에 건축·음악·문학·환경·과학·철학·종교·경제·정치 등 다방면의 행사가 83년부터 열리고 있다고 한다. 86년 5월31일부터 6월8일까지 열린 섬 페스티벌에 백남준의 퍼포먼스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류혜숙/자유기고가
자연과 건물은 9 대 1 비율로
꿈의 프로젝트, 홈브로이히 우주공간실험실의 대원칙들
작은 마을 노이스의 거대한 꿈은 한 개인에서 시작됐다. 뒤셀도르프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칼 하인리히 뮐러. 1982년 그는 수십 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며 수집했던 미술 작품들과 음악·문학 자료들을 전시할 특별 장소로 홈브로이히를 선택했다. 천연의 자연과 미술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미술관을 짓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후 뮐러는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을 노이스시에 기증했고, 뮐러와 시의 ‘꿈의 프로젝트’는 ‘저주받은 들판, 라케텐스테이션’으로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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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른바 홈브로이히 우주공간 실험실(Hombroich Spaceplacelab). 많은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이 각각의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성명서를 보면, 그들이 앞으로 진행해 나갈 작업에 대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개혁이나 혁명이 아닌 변화’다. 소리 내어 웅변하는 건물이 아닌 스스로 변화를 허용하는 건축이어야 한다. 둘째는 자연과 건물의 비율을 9 대 1로 제한한다. 물론 자연이 90%여야 한다. 셋째는 ‘단순한 교통체계’다. 포장도로가 아닌 자연 속을 자유롭게 횡단할 수 있는 열린 보도여야 한다. 넷째는 ‘전체 맥락 속의 디자인’, 다섯째는 독립적인 에너지 공급과 자원 절약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이고 도발적인 도시적 개발에 전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조화하는 건축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며, 모든 자연의 요소들이 인간과 동일선에서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공생과 보존에 대한 엄중한 선언이다.
노이스 여행쪽지
유기농 음식 꼭 맛보자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기차나 버스(709번)를 타고 노이스 시내에서 내린다. 노이스 졸스트라세(Zollstraße)에서 869, 또는 877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 기사들이 대부분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홈브로이히’라는 발음을 정확히 해주면 좋다. 진행방향 도로에서 왼쪽 숲 쪽에 홈브로이히 미술관이, 오른쪽 들판 쪽에 랑엔 파운데이션이 있다.
⊙홈브로이히는 4월부터 9월까지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10월부터 3월까지는 오후 6시까지 개관한다. 크리스마스와 이브, 연말 연초는 문을 닫는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반 10유로(1만4천원, 1유로=1400원), 25살 이하 학생과 장애인은 5유로, 주말과 공휴일에는 15유로, 7유로로 더 비싸다. 6살 미만 어린이는 무료다. 두 사람일 경우 콤비티켓을 사면 조금 싸다. 까페테리아에서 제공하는 노이스 지방의 유기농 음식들을 꼭 맛보자.
⊙랑엔 파운데이션은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연다. 올해엔 총 7번 휴관하니 홈페이지에 들러 날짜를 확인하자. 일반은 7.5유로, 6세 이하 어린이와 학생, 대학생은 5유로, 4∼6인 가족티켓은 19유로다. 콤비티켓도 있고 12인 이상일 경우 개인요금이 할인된다. 미술관은 유료지만 라케텐스테이션 전체 부지를 둘러보는 것은 무료다.
자료 출처_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