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너를 특별하게해” 박물관·미술관으로 간 일..

2009. 7. 28. 03:07카테고리 없음

 

반세기가 넘도록 초록색 유리병에 흰색 별 모양과 글씨를 사용해온 칠성 사이다(1950년 출시)는 한국 디자인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 신문로 2가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 마련된 갤러리 디플러스(D+)에서는 요즘 재미난 전시가 진행 중이다. ‘우리를 닮은 디자인, Korea Design Heritage 2008’이다. 반세기 한국현대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52개 품목이 다음달 6일까지 전시된다. 1950년 초록색 유리병에 담겨 처음 출시된 토종음료수 ‘칠성사이다’, 75년 처음 생산된 한국 최초의 자동차 ‘포니’를 비롯해 70~80년대 집집마다 들여놓고 썼던 꽃무늬 밥통과 흑백텔레비전, 87년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된 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작가 최병수씨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축소본 등 지난 40여년간 한국의 일상문화를 보여주는 물품들이다.

그런가하면 국립민속박물관 ‘한민족생활사’ 전시실에는 1920년대의 안방과 70년대의 안방이 재현돼 있다. 이전까지 한민족의 생활사를 재현하는 전시는 조선시대로 끝이 났지만 2007년 박물관이 재개관하면서 근·현대 생활사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두 개의 전시실이 추가로 설치됐다. 1920년대 안방에는 문갑과 거울달린 화장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인 ‘박가분’이, 70년대 안방에는 국민참고서 ‘수학의 정석’이 놓인 앉은뱅이 책상과 라면봉지를 접어 만든 방석이 함께 진열됐다.

1959년 금성사가 제작한 한국 최초의 라디오 A-501.

흔해 빠져서 그 가치를 알 수 없던 일상의 살림살이가 속속 박물관·미술관 전시실로, 수장고로 들어오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건국 60년 기념 특별전-그 고난과 영광의 순간들’을 열면서 정부수립 이후 60여년간 일상을 보여주는 물품위주로 기획전을 마련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열고 있는 ‘우리를 닮은 디자인’은 올 초 재단이 일상물품을 대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인품목을 선정한 ‘코리아 디자인 아카이브 사업’의 결과물로 기획된 전시. 여기에 한양대 박물관은 오는 22일부터 개교 70주년을 맞아 특별전 ‘모던 코리아 70 : 70년 동안의 한국현대문화혁신’을 마련했다.

이들 전시는 일상용품을 통해 지난 세기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겪으며 달라진 한국인의 일상을 증언한다. 신석기시대 패총을 통해 신석기 시대인들의 생활상을 추적하듯이, 지금 우리가 쓰는 일상용품을 비롯해 30~40년 전 사용했던 일상용품에 당대의 문화가 반영돼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런 일상용품은 대량생산·소비 시대 현대인들의 삶과 의식을 적극 반영한다.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천진기 과장은 “전통사회에서는 농업이 최대 산업이고 농민이 전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60년대 이후 농촌보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훨씬 많아지면서 전통적인 민속학, 인류학의 연구필드가 도시와 도시민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금, 여기’를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아마도 30세기의 후손들은 난지도 쓰레기매립지를 통해 21세기 한국인의 생활상을 이해하겠죠. 21세기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처럼 한국인의 소비패턴을 보여주는 공간과 거래 품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33평 아파트에 사들여 오는 데서 문화적 맥락이 생깁니다. 일반인들의 아파트에 보통 3000~5000가지 품목이 나오는데,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끌어들이면 바로 유물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누가 왜, 그 물건을 선택해서 어떻게 이용하고 살았는지를 밝혀줘야만 유물이 될 수 있습니다.”

1960~80년대 쓰이던 잉크병과 철필. 이후 볼펜을 비롯해 다양한 필기구가 80년대를 전후해 대량 생산되면서 철필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이 같은 일상용품으로 표상되는 물질문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학계에서 활발해진 미시사·일생사·개인사 연구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시대의 맥락을 증언하는 일상용품을 중심으로 수집과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민속학과 디자인 분야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근·현대 일상생활용품이 전시장에 선보인 것은 99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세기 말을 맞아 개최한 기획전 ‘추억의 세기에서 꿈의 세기로-20세기 문명의 회고와 전망’이 처음. 98~99년 동안 이뤄진 유물 수집을 바탕으로 열린 전시를 계기로, 근·현대 일상용품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이뤄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유물과학과 기량 학예연구관은 “전시를 계기로 근·현대 일상용품을 한 시대의 맥락을 보여주는 도구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우리를 닮은 디자인’은 시각·산업디자인의 측면보다는 지난 40여년간 한국적 정체성이 드러나는 품목을 선정하는 데 중점을 뒀다. 고도경제성장신화를 표상하는 경부고속도로, 80년대 세계 속에 한국을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 ‘근대화=서구화’로 받아들인 한국의 결혼문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 ‘궁전식 예식장’ 등이 포함된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에 초록색 비스코스사로 만들어서 40여년간 동일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이태리타올’, 알루미늄으로 만든 ‘철가방’, 30평형대 아파트와 함께 한국 중산층의 상징으로 가장 오랜기간 동안 장수하고 있는 자동차 모델 ‘쏘나타’, 93년 처음 선보여 ‘삼겹살에 소주’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중적인 회식문화를 상징하는 ‘솥뚜껑 불판’ 등이 포함됐다. 전시를 준비한 한국디자인문화재단 박수경 대리는 확장된 의미에서 디자인을 다뤘다고 설명했다. “여태까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일상물품에 대해서도 기록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온 듯합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디자인의 범위와 영역이 확대되는 의미 또한 갖고 있는 전시입니다.”

최근 공업사·기술사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전시를 매년 열고 있는 한양대 박물관은 특별전 ‘모던 코리아 70’에서 1939년부터 2009년까지 70년간 한국의 현대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에 초점을 맞췄다. 최초생산된 1호품 중심이다. 52년 남한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소주 ‘낙동강 소주’, 인스턴트시대를 연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1963년), 한국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64년), 국내최초의 판매용 생수인 ‘다이아몬드 생수’(76년), 91년 부산의 한 전자회사가 개발한 최초의 노래방기기, 95년 처음 출시된 김치냉장고 딤채 등이 선보이고 있다.

1960년대 옥수수나 쌀 등 곡물을 넣어 가열해 튀겨낸 과자를 만들던 추억의 뻥튀기 기계.

문제는 이러한 일상용품을 전시장에 펼쳐놓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것. 한때는 집집마다 갖추고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생활환경이 변하면서 일순간 사라져버려 수집이 어려운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70~80년대 어느 가정집에나 있던 ‘못난이 3형제’ 인형이다. 수집가들조차 제짝을 맞춰 갖고 있는 이들이 별로 없을 정도다.

20~30년, 아니 불과 10년만 지나도 과거의 일상용품을 수집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이 같은 희소성 때문에 일상용품의 전시와 수집에는 많은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1호품은 이를 생산한 회사마저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59년 처음 생산된 금성사의 라디오 A-501이 바로 그 사례다. 처음 생산된 1호품인 데다 국내 최초로 도안실을 만들고 전문디자이너를 채용해 생산한 첫 물품이다. 구하려고 해도 드물어서 부르는 게 값이다. 약 2000만원에서 3000만원을 호가한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우리를 닮은 디자인’에 선보인 자동차 ‘포니’는 개인수집가로부터 대여했다. 대여비용이 비싸서 전시개막 전날인 지난 13일부터 19일까지만 야외에 전시됐는데, 일주일간 대여비용만 200만원이었다.

1960년대 초등학생의 일제고사 시험지.
70년간 고수하던 상표명과 상품패키지 디자인을 혁신적으로 바꾼 진로의 소주 ‘참이슬’은 진로에서도 1호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패키지디자인을 담당한 회사에서 빌렸다. ‘참이슬’ 한 병의 보험가는 100만원으로, 전시를 위해 빌려오는 데 운반비만 40만원이 들었다. 이 소주는 일명 뽁뽁이로 불리는 에어캡에 싸여 무진동차량으로 운반되는 등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국내 최초 생산된 OB맥주와 칠성사이다도 보험가액이 50만원에 이른다. 75년 제작된 오리표 싱크대는 서울 숭인동 아파트에 처음 설치됐던 것. 70년대 후반 싱크대는 입식 부엌의 보급된 일체형 부엌가구를 통칭하는 용어로 정착했고, 싱크대의 보급으로 가정주부의 가사 업무가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재단 측은 싱크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 낡은 싱크대를 통째로 떼어오는 대신 소장가에게 새로 싱크대를 설치해줬다.

그러나 이렇게 알음알음 수소문해 원형 상태의 일상용품을 수집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지난해 ‘건국 60년 기념 특별전-그 고난과 영광의 순간들’을 기획하면서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동차 ‘포니1’을 구입하려 애썼지만 대당 3000만원 이상을 나가는 고가여서 포기했다. 기량 연구관은 “원형그대로인 1호품을 입수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지금은 그런 욕심까지는 내지 못한다”면서 “생산자·회사마저도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기록을 하려는 노력이 소홀하다”고 아쉬워했다.

한양대 박물관의 경우 지속적으로 구입을 통해 유물을 수집하고는 있지만 충분치 않아서, 박물관 내 문화재 발굴팀과 공조해 일상용품을 수집하고 있다. 박물관 김승 과장은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거나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버려진 폐가나 새로 집을 지으려는 옛집을 찾아 버리는 물건을 수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골동상이나 개인수집가를 대상으로 일상생활용품을 구입·수집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2007년부터는 1년에 두 차례 소장품 공개구입 공고를 내서 근·현대 생활사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 해 유물 구입예산 28억여원 중 근·현대 생활사 유물 수집에 6억~7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모든 것이 수집의 대상이 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수집하지는 않는다. 한국전쟁, 새마을운동, 88올림픽처럼 한 시대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주제어를 선정해 이와 관련된 유물을 수집하고 있다. 올해는 의생활과 88올림픽이 주제어. 올림픽복권과 기념배지뿐 아니라 80년대 호돌이 마크가 그려진 노트와 크레파스, 플라스틱 도시락통 등 88올림픽 관련 일상용품과 ‘동대문시장’이라는 제조사명이 선명한 70년대 제작된 아동복,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때 입던 롱드레스 등이 박물관내 유물보존실에서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쓰고 폐기되기 일쑤인 일상용품의 특성상 과거의 살림살이 유물뿐 아니라 동시대의 일상용품 또한 열심히 모으고 있다. ‘올해의 히트상품’과 ‘1호품’은 매년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용품의 수집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기량 연구관은 “올해 안으로 일상용품의 수집 기준을 세우려 하는데, 민속학자뿐 아니라 물질문화에 관심있는 사회학자들과 연계해 현재의 생활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료 출처_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