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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260호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이 보관돼 있던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 지금은 11월 개관할 예정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모현관 옆 미암유물전시관에 옮겨져 있다. 해남에서는 '미암의 학문적 맥을 잇기 위해 미암 바위와 팔각정 일대를 미암 공원으로 조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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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5일 이른 새벽, 멀리서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파루의 종소리가 울리자 이미 잠에서 깬 미암은 이불 속에서 그 종소리를 헤아리고 있었다. 오늘은 미암이 오랜 유배에서 풀려 복직해 임금 앞에서 첫 강론을 하는 날. 명종 후기로 들어서 명종의 친정체제에 따라 문정황후의 영향력이 쇄약해지고, 윤원형 등이 숙청되면서 앞서 수차례에 걸친 사화의 명현들이 하나 둘 복권되며, 특히 기묘사화 명현들이 대거 복권되었다. 명종 말년에 이르러 최후로 을사 3현으로 추앙되던 미암 유희춘, 노수신, 김난상이 복권, 미암도 충청도 은진으로 양이 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성균관 직강 겸 지제교로 재 등용되었으니 유배 19년만의 일이었다.
미암은 임금 앞에서 행할 첫 강론을 생각하니 말을 타고 입궐하는 내내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속으로 읊어보았다.
남쪽바다 북쪽 바다 쓸쓸한 땅에 23년 동안 버려뒀던 몸. 옛 친구 생각하며 쓸쓸히 문적부(聞笛賦)만 읊고 고향 오니 어느덧 도끼자루 썩은 사람과 같다. 가라앉은 배 옆에 온갖 배들 가는 것을 보지만 병든 가지에 그래도 한 점 봄이 있다. 오늘밤은 장락궁 곁에서 종소리를 들으니 술 마시지 않아도 정신이 상쾌하다.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자신의 처지를 마치 도끼자루 썩은 사람에 비유하면서도 임금을 모시게 된 기쁨을 시로 적어 스스로를 위로해 본 것이다. 이즈음 조선은 새로 등극한 임금(선조)의 나이가 15세에 불과하여 그 어머니인 자전(慈殿-선왕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이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미암은 "심대비께서는 널리 경사를 보시어 의론이 줄줄 나오시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시며 실수가 없으시니 참으로 여중의 요순이시다"라고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한다. 이 날부터 10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 낸 일기가 보물 260호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미암일기'다.
미암 유희춘의 호는 미암바위에서 유래되었다. 해남읍을 병풍처럼 받치고 있는 금강산아래 미암바위, 그는 당파싸움으로 정치가 어지러웠던 1513년(중종8) 12월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감포만호를, 증조부는 진사를 지냈으나 부친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에만 열중했으며 어머니는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한 금남 최부의 둘째딸이다. 그러니까 미암이 최부의 외손이 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당대의 선비 최산두, 김안국에게 사사, 특히 김안국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는데 너무 영리했기 때문에 제자로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을 폈다고 한다.
중종 32년 생원시에 합격, 그 이듬해 별시병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보임되고 춘추관, 기사관등을 거쳐 중종 37년에는 세자강원설서에 임명돼 동궁을 돌며 지도하였으니 그 지식의 깊이를 알만하다. 그러나 인종이 죽자 세력을 얻게 된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파직 당하고 이듬해 소위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문정왕후는 죄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미암을 제주도에 유배했다가 고향인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보내버렸다.
종성에서 미암은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밤낮으로 사색에 잠겨 저술을 계속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여 변경지역 주민의 교화에 힘쓴다.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세력이 쇠퇴하자 을사파 죄인들의 사면복권이 일어나 선조 원년인 1567년에 홍문관교리, 이조판서를 거쳐 학문하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선망되었던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미암의 학문적 경향은 유학경서에 충실한 경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학의 사상적 형이상학적 연구를 중시했던 도학에 대해 그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공허한 학문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도 이 문제를 가지고 퇴계이황과 자주 논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후진양성을 중시했던 영남학파들에 비해 미암은 문하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최초의 장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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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 원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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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일기에서 쓴 장서를 구축한 방법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중앙과 지방의 목판에서 책을 찍어내고, 기증을 받고, 사들이고, 교환하고,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3500여 권에 달하는 거대한 장서를 마련하게 된다.
사후 20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서책이 사라졌지만 만약 이 책들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지적 활동 규모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암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문집 '국조유선록', '역대요록'2편, '동몽구', '미암일기' 등 몇 가지다. 이중 '미암일기'는 역대 기록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 10월 1일부터 1577년(선조 10)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의 세월에 걸쳐 조정의 공무에서부터 자신의 개인사까지, 부록으로 부인 송 씨의 시문과 잡록까지 실려 있어 그 방대한 양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관료들의 문화·사회·정치·경제·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잦은 사화로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경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인심조차 흉흉해졌던 시대, 미암이 써낸 일기형식의 저술은 당시의 사회를 고발하며 안타깝게 지켜본 엘리트지식인의 최소한의 양심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암일기'가 역사에서 주목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선조초년의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그의 일기가 주요 자료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임란으로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타버리자 그 후 조선실록을 만들 때 이이의 경연일기와 미암일기를 참고하여 선조실록을 꾸몄다.
'미암일기'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제8)으로 간행하였고,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 국역간행(1992∼1996)하였다. 담양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는 미암집 목판 396판(1869년 판각), 고문서(1910년 이전 197건), 전적(1910년 이전 36건), 유품, 의암서원 관련 자료가 보관돼 있는데 최근 미암유물전시관이 건축되면서 이전 작업을 거의 마무리했다.
미암이 해남출신이지만 담양에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부인 송 씨가 담양 출신으로 미암이 24세 때 결혼과 함께 과거급제를 해 관직에 오르면서 거처를 담양으로 옮겼기 때문. 담양군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도비, 군비 총 60억 원을 들여 2000평 규모의 대지에 전시관 교육체험관 등 미암유물전시관을 짓고 있다.
올 11월에 준공식을 갖고 내년 미암 탄생 50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일반에게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아깝다. 미암이 생전에 그리워했던 고향이 처가인 담양만은 아니었을 텐데 그의 탯자리가 있는 해남에서는 왜 미암관련 문화콘텐츠를 마련하지 못하는가?
언젠가 해남유지 한분의 '미암의 학문적 맥을 잇기 위해 미암 바위와 팔각정 일대를 미암 공원으로 조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현재 해남읍의 서림공원은 나무의 수명이 다해 점점 고사돼 가고 공원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어 미암바위 부근을 서림공원을 대신할 해남의 상징적 공원으로 조성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매우 적절한 제안이라고 본다.
요즘 유행하는 무슨 무슨길처럼 미암길도 만들어 그 길을 걷는 후손들이 '지독한 기록 벽으로 16세기 사회와 살림살이를 볼 수 있는 귀한 열쇠'를 우리에게 준 조선의 한 선비 미암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암은 누가 뭐래도 그의 학문도 지위도 아닌 '일기'를 남긴 것으로 존재감이 크다. 정국 동향, 사신 접대, 홍문관 근무시 경연 기록은 물론 가계의 수입과 지출, 이사, 집수리, 건축, 혼례풍습, 집안잔치 등 집안 대소사를 꼼꼼히 기록, 당시 양반가정의 일상이 마치 일일드라마 보듯이 떠올려진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무려 18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부인 송 씨는 담양에 있었지만 해남엔 첩 방굿댁과의 끈끈한 삶과 해자 돌림 네 명의 딸이 있었고 아내가 도망쳐버려 실의에 빠진 몽근이, 말먹이를 도둑질해서 먹은 걸 들키는 바람에 볼기를 맞는 한풍이 등등 종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안네의 일기'에서 보듯이 일반에 공개된 일기의 일부는 문학사에 족적을 남기는 문학작품이 된다. 실제의 일기가 문학작품이 되는 반면에, 일기의 형식을 따온 문학작품도 다수 존재한다.
우리도 '미암일기'의 드라마적, 교육적 가치를 살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미암 공원을 배경으로 500년 전 사회경제, 인물, 복식, 의례, 민속, 민간요법, 교육, 어학 등으로 세분화하여 당시 생활상을 집대성한 에듀컬처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디지털 일기쓰기대회' 같은 것도 구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일기를 쓰는 남자, 쫀쫀하다 할 만큼 별 걸 다 기록한 일기 덕분에 미암은 멀고 먼 조선시대의 낯설고 창백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옆의 이웃과 같은 친근감이 든다. 미암을 모델로 한 선비 캐릭터 개발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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