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고산 윤선도 <하>

2012. 5. 4. 15:12카테고리 없음

문화콘텐츠를 위한 땅끝, 해남의 인물자원
       
⑤ 고산 윤선도 <하>
우리말의 아름다움 살린 시조문학 최고봉
2012년 05월 01일 (화) 10:31:25 해남신문 hnews@hnews.co.kr
   
 
  지난해 한국건축문화 사회공공부문 대상을 차지한 해남읍 연동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전시시설은 훌륭하지만 전체 환경이 고산의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자연에서 완성된 은유와 풍자의 문학

고산의 삶을 조명할 때 도대체 이 천재적 재능을 가진 조선선비를 어떻게 한마디로 규정해야할지 난감해진다. 그는 학문만이 아니고 철학을 위시해서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정치, 학문, 예술 전반에 걸쳐 조예가 깊었고 천문, 음양지리, 복서, 의약 등 다방면에 통달했다. 또 부용동, 금쇄동과 같은 원림조성과 간척사업을 하기도 했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해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했고, 강한 실천의지를 가졌는데 그러다 보니 자주 정적들의 공격대상이 됐다. 특히 노비, 어민, 농민, 빈자 등 여러 방면의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이 높을 뿐 아니라 각 방면에 높은 전문지식을 갖고 저술을 통해 이론과 함께 실천하기까지 했던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산의 평가는 그의 문학적 업적, 즉 그가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자연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뛰어난 은유와 풍자의 미학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조경학자 성종삼씨는 "고산은 대다수 조선선비들의 자연탐미와 풍류적 취향을 넘어서, 자연 속의 섭리와 질서를 찾아내어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연과의 합일적 경지를 추구하였다"고 해석을 했다. 그렇게 달성한 자연과의 합일에서 나온 것이 그의 예술이며 대표작이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다.


내 버디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머엇 하리
구름 빗치 조타 하나 검기를 자로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는 믈 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플은 어이 하야 프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 손 바회 뿐인가 하노라
<산중신곡 중 '오우가' 후략>

정적들의 공격에 경계심 놓지 못해

'오우가(五友歌)'는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 형식과 내용상의 대칭적 구조, 시상의 점층적 확대 등이 잘 나타나 있는 한글시조다. 표현기교뿐만 아니라 주제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치밀한 구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데서 국문학사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글학자 조윤제는 일찍이 '시조가 여기까지 오면 갈 곳까지 다 갔다는 감이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우가'는 윤선도 문학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등 다섯 가지 자연물을 벗 삼아 억제된 욕망과 슬픔을 달랬던 것. 그런가하면 65세 되던 1651년(효종2년) 가을에 쓴 어부사시사는 어부의 생활과 자연의 경치를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별로 10장씩 모두 40장으로 읊은 가사다. 그의 생애에 한시 358수, 시조 75수를 지었는데 어부사시사야말로 한글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봄은 노래한 춘사(春詞)에서는 이른 봄에 고기잡이를 떠나는 광경을 마치 동양화 한 폭처럼 그려내고 있다. 여름을 노래한 하사(夏詞)에서는 속세를 벗어난 고기잡이노인의 즐거운 일상을, 가을 편인 추사(秋詞)에서는 속세를 떠나 자연과 동화된 삶을 그리며, 또 겨울을 노래한 동사(冬詞)에서는 어디서 느닷없는 강풍이 행여 불어올까 두렵다며 정적들의 공격에 대한 경계심을 은유적으로 드러내었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밤물은 거의 지나고 낮물이 밀려온다
찌그렁 찌그렁 어영차
강촌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어부사시사 春(1)-

궂은비 먼저가고 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낚시를 둘러매니 깊은 흥을 못금하네
찌그렁 찌그렁 어영차
연강첩장을 그 누가 그려낸 가
-어부사시사 夏(1)-

물 외에 깨끗한 일 어부생애 아니더냐
배 띄어라 배 띄어라
어옹을 비웃지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냐
찌그렁 찌그렁 어영차
사시흥이 한가지나 추흥이 으뜸이라
-어부사시사 秋(1)-

구름이 걷은 후에 해볕이 두껍구나
배 띄어라 배 띄어라
천지가 폐색하니 바다는 의구하다
찌그렁 찌그렁 어영차
끝없는 물결이 깊핀듯이 하여있다
-어부사시사 冬(1)-


송강과 함께 조선시가문학 대표주자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과정을 거치고 서울의 사학(四學)에서 공부를 한 고산은 이미 열네 살에 '자국도회주(自國島回舟)' 등의 한시를 통해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하늘은 고산에게 좋은 가문과 부와 재능을 주었지만 유난히 전란이 많고, 영욕이 교차되었던 생애를 보면 운까지 다 주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노년이 매우 고적했는데, 세 아들 인미, 의미, 예미가 생전에 먼저 죽었고, 의미의 아들 고산의 손자 이구 또한 서른을 못 넘기고 죽었으니 후사 없이 떠난 손자의 죽음 앞에서 일흔의 노인은 "자신의 재앙이 손자까지 미쳤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1639년(인조 17년) 6월 정적들의 모함으로 떠났던 두 번째 유배가 풀렸다. 그런데 유배지인 영덕의 적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오던 중 고산은 애지중지하던 여덟 살짜리 서자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는다. 이 때 통곡을 하며 적은 시가 도미아(悼尾兒), 견회(遣懷) 등 절절한 슬픔이 묻어나는 두 편의 시다.

너 죽어도 염하여 못 거둬주고(汝沒殮不撫)
너 아플 때 약 한번 못 써보았네(汝病藥不試)
그래서 내 상심 더욱 더 크니(所以增我傷)
애통함을 어디에도 견줄 수 없네(痛悼無與比)
밥상에선 눈물이 떨어지고(臨泣涕垂匙)
말을 타니 눈물이 고삐 적신다(騎馬壘霑斑)

아이의 죽음이 그를 더 은둔의 장소로 찾아들게 한 것일까. 해남으로 내려온 윤선도는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은거할 곳을 찾는다. 그리고 1640년부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에 머문다.

인적하나 없는 그 산꼴짜기에서 시인은 '금쇄동기'를 필두로 여러 편의 한시를 지었다. 금쇄동과 부용동을 오가며 은거한지 3년째인 1642년 한글미학에 푹 빠져 저 유명한 '산중신곡'의 '오우가'와 '어부사시사' 등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학자이기도 하고 남인의 투사로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가장 빛이 났다. 우리 문학이 우리 글(한글)로 우리의 정서를 나타낸 것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고산은 분명 국문학의 비조(鼻祖)임에 틀림이 없다.

소로우의 '천국'과 고산의 '선계(仙界)'

빼어난 예술작품 하나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나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주인공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찾아 모여들게 하는 것, 그것이 문화의 힘이다.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소로우의 '월든'호수는 단지 작품 하나만으로 그 나라의 영적 장소가 되기도 한다.

월든 호수(Walen pond)는 보스톤에서 서쪽으로 20마일정도 덜어진 콩코드지방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 호수를 천천히 걸어서 한바퀴 돌아도 한 시간이면 족할 그런 작은 호수다. 이처럼 자그마하고 별로 볼품이 없는 호수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유는 소로우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소로우의 정신이 아직도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160여 년 전 이곳에 머물면서 '월든'이란 책을 썼다. 자그맣고 소박한 오두막 집, 침대하나, 작은 책상과 세 개의 의자, 벽난로와 불소시게 통이 고작이다. 난로 위에는 간단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냄비가 걸려있다.

   
 
  월든 호숫가에 있는 소로우의 오두막. "단지 '세 개의 의자'만 있으면 족하다"는 한 문장으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미국인들의 영적 장소가 되어있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둘은 우정을 위한 것이며, 셋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라고 그가 기록했던 곳, 소로우는 이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하였다. 대표작 '월든'은 환경과 생태가 현대사회의 화두가 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를 더해가고 있다.

500년 전 고산이 살았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이상향으로서의 선계를 꿈꿨다. 고산은 보길도의 부용동이나 해남의 문소동, 금쇄동의 자연적 지형, 지세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며 이상향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가장 한국적 사고와 정서가 집약된 원림구성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비록 300년이라는 시공의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는 동일하지 않았을까. 속세의 영화와 번잡을 멀리하고 초월적 삶을 찾아 숲 속에 은둔했던 두 사람 모두에게서 동일한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채석작업으로 많이 훼손되고 문소동이고 금쇄동이고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위대한 문학작품을 탄생시킨 그곳을 우리는 소홀히 방치해서는 안 된다.

김원자(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