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김남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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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김남주 시인
해남이 낳은 '나의 칼, 나의 피'의 전사시인
2012년 05월 29일 (화) 11:35:29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문병란 시인은 일찍이 "이 혼란과 변절의 시대에 김남주시인(1946~1994)을 말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다. 그의 벅찬 삶을 감당한다는 것은 그와 비슷한 흉내라도 내야만 자격이 생길 터인데, 지금 이 땅에 전개되고 있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추태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시를 읽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고 했다. 김남주의 무엇이 그 또한 평생 민중시를 써온 노 시인으로 하여금 이렇듯 고통스럽게 하며 이 글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부끄러움을 갖게 하는 것일까.

온 산야가 꽃향기로 그득한 5월이지만 그 향기 속에 광주5·18의 아픔도 묻어있는 5월항쟁 주간에 김남주를 찾아 나선다. 그 무섭던 군사정권 시절에 예언적 사명으로 민중의 혼을 불어 넣다가 감옥에 간 시인, 그는 20세기 식민과 분단의 암울했던 조국과 민중의 현실을 목숨걸고 고발했던 '혁명시인'이었다. 한 치의 타협과 굴함이 없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철저하게 투쟁하며 살다 짧은 인생을 마감한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해남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었다. 

고뇌와 투쟁으로 이어진 불꽃같은 49년 삶

김남주시인은 1946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에 반발하여 2학년 때 자퇴, 1969년 검정고시로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에서는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는데,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하였다.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김남주시인 생가. 대학에서 제적을 당한 후 이곳 고향에 돌아와 농토와 농촌, 농민을 보면서 민족현실에 눈을 뜬다.  
 
 

8개월간 복역한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를 결성한 뒤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가,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이 시기 그는 철학과 문학, 사회과학, 경제학 등 폭넓은 독서와 고민 그리고 연구를 바탕으로 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문학과 사상, 세계관을 완성해갔다. 1984년 수감 중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은 그가 감옥 안에서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 이듬해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결혼하였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 건강이 악화되어 사퇴한 뒤 췌장암으로 고생하다 1994년 사망하였다. 

그가 스스로를 '시인'이 아닌 '전사'라고 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시는 강렬함과 전투적인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며 유장하면서도 강렬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 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및 노동 문제 등 현실의 모순을 질타하고 참다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시집 1987 <나의 칼 나의 피>·1988 <조국은 하나다>·1990 <사상의 거처>·1995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등과 시선집 1989 <사랑의 무기>·1990 <학살>, 산문집 1991 <시와 혁명>,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1978<프란츠 파농> 등이 있다.

'자주·민주· 통일' 시로 외친 '20세기 가장 완전한 한국인'

49년 간 혁명의 불꽃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시인의 삶은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수감기간 동안 옛 동지와 나눈 눈물겨운 사랑이 그렇고, 감옥에서 나와 그동안 갈고 닦은 세계관을 채 펴보기도 전에 덮친 병마에 홀연히 떠밀려간 삶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 때문에 김남주의 삶은 더 많은 여운을 주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오늘도 그의 생애와 철학, 가치관을 연구하며 그의 시는 많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넓게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실천 활동을 게을리 한 한 지식인의 양심의 가책으로 '김남주평전'을 썼다고 했던 강대석교수는 김남주의 시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어떤 역사학자보다도 더 명확하게 분단의 이면을 밝히고 있다"며 "우리 민족에게 조금이라도 주체성이 있었더라면 이 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야 했었다. 썩어 빠진 친일파 문학가들의 작품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교과서에서 이 시는 조국을 지키는 위대한 기념비로 우뚝 서 있었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중략)
나라가 온통
피 묻은 자유로 몸부림치는 창살
삼팔선은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

강 교수는 또 "김남주는 그의 시와 투쟁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는 것이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생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면서 "그를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한국인' 혹은 '한국의 체 게바라'라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시인' '전사'로 어둠을 불사른 김남주 시인의 '조국은 하나다'는 오늘도 독자들의 가슴을 세차게 치고 있다.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중략)

그리고 나는 내걸리라 마침내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에 내걸리라
나의 솔로건 "조국은 하나라"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들의 손가락 끝도
언제고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었다는 신의 입김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하늘 높이에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나"를!

5·18과 김남주시인, 그리고 우리들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 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중략)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무덤 앞에서'> 

  
 
 광주 중외공원 비엔날레전시장 앞에 세워진 시인의 흉상.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민중 항쟁의 지도적 인물로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에서 산화한 윤상원. '남민전' 사건으로 십 년을 복역하고 나온 김남주시인은 어느 날 사랑하는 벗의 묘지를 찾아 사자(死者)와 말 없는 대화를 나눈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 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시인이 '오, 나의 자랑 상원'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혹은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가 아니다. 시인이 맨주먹 빈손으로 벗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시인은 벗에게 나지막이 부탁한다.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들불을, 밤의 노동자를, 그리고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인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나에게 다오."라고. 우리가 김남주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갖는 것은 아마도 시인의 맑은 영혼에 비추는 우리의 삶이 구차해보여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김원자(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