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초의선사(草衣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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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초의선사(草衣禪師)
삶과 구도가 하나임을 실천한 진정한 선지식인
2012년 07월 06일 (금) 15:56:29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초의선사가 기거했던 일지암. 80년 생애 중 40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우리 전통차 문화를 꽃 피웠다. 
 

요즘은 한풀 꺾였지만 녹차의 대중화라 할까. 차 마시는 일이 그야말로 다반사, 일상사가 되었다. 

녹차이야기를 끄집어 낼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선사(艸衣禪師)다. 녹차를 어떻게 마셔야할지 난감할 때 다법을 제일 먼저 기록으로 남겼던 분이 그 분이기 때문이다.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하면서 우리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우리전통차의 발전 뒤에 우뚝 서 계시는 분, '땅끝 해남의 인물자원'으로 초의선사는 너무나도 매력이 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그 분의 탯자리는 해남이 아닌 전남 무안군이지 않은가. 무안군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초의선사에 관한 자료와 함께 생가사진 및 매년 열리는 초의문화제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아무렴, 그래도 나는 초의선사를 해남에 모셔 문화콘텐츠의 제일 윗자리에 앉혀드리고 싶다. 80년 생애 중 40년을 이곳 대흥사에서 지내셨으니 속가의 인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명실상부한 해남의 인물이고 해남의 자랑이지 싶은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고장답게 해남은 전국적으로 다인회 활동이 활발한 곳이고 초의선사의 영혼을 만나러 일지암을 찾는 여행객 수도 적지 않다. 다인도 아니고 불자도 아닌 이에게는 초의선사가 아련히 먼 곳에 계신 성인으로만 존재하겠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보면 그 분의 인간적 풍모와 르네상스적 삶의 스케일이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초의선사, 당신은 누구신가요?

남종화의 시조 소치 허련이 쓴 『소치실록』 중 '초의선사와의 인연' 편에는 이런 글이 있다.

객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다른 법문과 연계를 맺었거니와 초의라는 선사 한 분이 있었지요. 그 선사는 외따로 초가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적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여 초의 선사와 정결한 인연을 맺었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바로 그 노장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소시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에 나는 대둔사에 있는 한산전(寒山殿)으로 들어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초암에 있는 선사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蓮花)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 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초의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 밖의 고상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도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초의노장(草衣老長)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19세기 대표적인 남종화의 대가로써 시·서·화에 능했던 소치,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그림에 몰두하여 오늘날 아들인 미산(米山) 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방계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온 호남 서화전통의 맥을 이루었던 소치를 읽다보면 의외로 초의(1786~1866)라는 불가사의한 한 봉우리를 만나게 된다. 초의선사가 소치에게 요즘말로 하면 멘토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초의선사가 강진 유배생활 중이던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유서와 시부를 익혔던 다산초당. 
 
유가경전이나 역사, 지리 등에도 높은 식견

소치의 묘사를 조금만 더 들어보자.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것에 두어간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리면서 뜰 복판에 파 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다(茶) 절구를 마련해 두고 있었습니다. 초의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의 달이 
훤하게 담그어지고, 
낚싯대 드리우니 까마득히
구름 샘에 통하도다.

또 이런 시도 있습니다.

눈을 가리는 꽃가지를 꺾으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았던가.

눈을 지그시 감고 당시의 풍경을 떠올려 보면 거기 성과 속, 교와 선을 넘나들며 진정한 구도를 이루고자 했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선승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려시대의 야운 선사의 『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풀뿌리 나무과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송낙과 풀 옷으로 몸을 가린다'라는 선 게송에서 따온 초의라는 법명이 말해주듯 초의선사는 일지암에 주석하면서 자연과 차를 벗 삼아 구도의 삶을 살았다. 선사는 또한 선(禪)과 교(敎)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 제반 학문까지 조예가 깊었으며 범서에도 능통하였다. 

24세 때 강진에 와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1762년~1836년)과 교류하고 유서와 시부를 익혔다. 30세 되던 해 처음으로 한양에 올라가 추사 김정희, 김명희, 김상희 형제와 자하, 신위, 홍석주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이들 문사와의 교류는 평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화운(和韻) 한 시가 60여수나 된다. 

선사는 차츰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오히려 은거의 뜻을 갖고 39세 때 대흥사 동쪽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지어 그 후 일생을 보내는 근거지로 삼는다. 43세 때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茶神)전(傳)을 등초하였고 45세 때 이를 정서 하였으며 52세 무렵에 《동(東)다(茶)송(頌)》이라는 차생활의 멋과 우리 차의 우수성을 기리는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다성(茶聖)에 가려진 고승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 가져와


그 뿐이랴? 초의선사는 유가경전이나 역사, 지리 등에도 깊은 관심과 식견을 가졌었다고 한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박사학위 논문인 「초의선사의 다문화관 연구」에 의하면 초의선사는 『금강경』 등 불교 경전과 조사어록은 물론 『주역』, 『논어』, 굴원의 『초사』와 당송 대 시문, 운율사전, 시에 대한 비평서, 역사서, 지리 전문서는 물론 자신의 저술인 『초의선과(草衣禪果)』, 『선문사변만어』등을 통해 불교와 인문학의 여러 범주를 자유롭게 넘나든 멀티지식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10년(1786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의순(意恂)이요. 자는 중부(中孚)로 무안 장씨의 후손이다.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탄생했다고 한다. 초의는 5세 무렵 강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인근 사찰의 스님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 스님은 출가할 것을 권했다. 그의 나이 16살이 되었을 때 불문과 인연을 맺게 되어 나주시 다도면에 자리 잡은 운흥사에서 벽봉민성(碧峰敏性) 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 때 받은 법명이 의순(意恂)이다. 의순은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사미계를 준 민성스님께서 내린 법명이다.

이후 스님은 20세가 되던 해에 대둔사 완호 윤우(玩虎倫佑)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는다. 당시 고승대덕이었던 완호스님 문하에는 '의(衣)'라는 돌림자를 가진 제자가 셋이 있었는데 호의, 하의, 초의가 그들이다. 완호 스님이 초의(艸衣)라는 법호를 내린 것은 그의 귀기어린 천재성과 번득이는 재주들이 그윽하고 완곡하게 감추어 주려는 뜻에서였다. 초의는 19세 때 영암 월출산에 올라갔다가 해가 지면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경험한 이후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불경과 선(禪), 노자, 장자, 범서 등 여러 학문에 정진하여 통달하게 되었다.

오늘날 초의선사가 한국차문화의 중흥조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다승으로만 알려진 것은 편견에 치우친 것이라는 견해가 높다. 선사의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가 전(專)선(禪)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반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즉 제법(諸法)불이(不二),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특히 다선일미사상에 심취하여 차를 통해 법희선열식의 다선삼매에 들곤 하였다. 일찍이 대흥사를 크게 일으킨 중흥조로서 13대종사에 이르렀고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우리나라 전통차 문화를 꽃피운 선사는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 하였다. 혼란과 격변의 조선후기에 태어나 한국 다도를 일으키고,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킨 대선사로서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실사구시를 주창한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우리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으로 존재한다. 

김원자 (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