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법정(法頂)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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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법정(法頂)스님
'무소유'철학자의 생가복원, 뭔가 달라야한다
2012년 08월 03일 (금) 11:41:12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법정스님이 불교계뿐 아니라 우리사회에 남긴 유산은 참 많다. 탐욕의 사회를 질타하듯 그는 '무소유'를 강조했으며 세상과 소통하듯 가끔 써낸 글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와 노래였다, 
 

마하심보살이란 법명을 가진 후배가 최근 교통사고로 비명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늦게 배운 서툰 자동차운전이 원인이었다 한다. 그 후배로 인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시던 법정을 뵈러간 적이 있고 근 삼십 년 가까이 절이나 스님들의 생활을 엿보며 불교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되었는데 후배가 떠났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임종이 '다 버리고 떠난다'는 말임을 새삼 깨닫는다. 일찍이 '버리고 떠나기'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들을 훈련시켜온 이는 법정스님이었다. 스님을 설명하는 여러 말 가운데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마도 줄곳 어디론가 떠났던 사람… 떠난다는 일을 일상으로 환치시켜 의미를 부여해 온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살다 떠난 작은 오두막을 손질해 살면서 숲 속 정갈한 물 한 모금 같은 수필 한편씩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다 저 지난해 홀연히 떠나버린 사람. 나는 그를 스님이라기보다는 철학자나 문장가, 사상가로 명명하고 싶다. 

자타공인 언어의 마술사

70~80년대 출판되어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던 법정스님의 책들을 기억할 것이다. 법문집 '산에는 꽃이 피네'와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산문집 '무소유'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 일련의 책들은 나오는 책마다 특유의 정제된 언어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세속과 떨어져 산속에 묻혀 사는 삶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우리사회에 남긴 유산이 참 많다. 

널리 알려졌듯이 '무소유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것 외에도 1994년에 창립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통한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의외로 정치적인 입장도 표명,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어짐이 없이 마음과 몸을 따로 하지 않는 하화중생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그의 글과 말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 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아름다움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따라야 한다. 소유하려 들면 텅 빈 마음으로 보는 여유가 사라진다. 사랑은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 시간은 목숨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시이고 가슴에 맺히는 노래와 같은 스님의 글을 대중들은 사랑하고 지금도 그의 절판유언을 아쉬워하고 있다. 

'무소유'자체보다'어울림'의 철학 추구

서울 성북동에는 길상사라는 절이 있다. 이 터의 옛 주인은 김영한(법명 길상화)으로 한 때 그 자리에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던, 백석시인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여인이었다. 평소에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절터를 통째로 보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는 무려 10년간을 법정스님께 받아달라고 졸랐다. 스님은 처음에 사양을 하다가 뜻이 간절함을 알고 마침내 받아 들여 이름을 '길상사'로 짓고, 김영한 공양주에게는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법명으로 보답을 했다. 그게 1996년이니 벌써 십몇 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길상사는 공양주의 뜻대로 아름다운 부처님의 소리를 펼치는 대중사찰로 자리매김을 했다. 김영한보살이 보시할 당시 싯가로 약 1000억 원대였다고 하니 무소유의 철학이 눈에 보이는 물질도 만들어내는 놀라운 힘도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 

법정스님은 길상사가 만들어지기 전 이미 '맑고 향기롭게'라는 사단법인을 이끌고 있었고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옛 고승들이 선풍을 일으켰듯이 흐리고 거친 세상에 맑고 향기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게 아니라 "탐욕을 버리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무소유'란 책이 워낙 유명해 법정하면 '무소유'를 떠 올리지만 사실 그의 핵심은 어울림이었다. 불일암이나, 강원도 산골에서 17년을 기거할 정도로 속세를 멀리했지만 글과 말로써 끊임없이 대중들과 교감했던 걸 보면 그는 겉모습과 달리 따뜻한 사람, 어울림을 중요시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불교의 틀에만 머무르지 않고 종교 간 화해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아닌 바로 친절" 이라고 말하며 김수환 추기경을 길상사 개원 법회에 초대하는가 하면, 천주교 신문에 성탄메시지를 기고하고 명동성당에서 강연을 했으며 개신교나 원불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문내면 선두리 법정스님 생가. 
 
생가복원, 박수량의 백비(白碑)에서 교훈 얻었으면

불가에서는 '고향'을 물으면 결례라고 한다. 부처에 귀의하는 것을 속가를 떠나 출가했다고 하는 스님들에게 생가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법정타계 3주년째인 올해 해남에서는 '법정스님생가 복원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전 이런 유언을 했다.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棺)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茶毘)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번거롭게 격식을 차리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화장하며, 사리도 찾지 말라는 말은 스스로 집착과 명예욕에 대한 추상같은 단절이다. 심지어 가장 애착을 가졌을 출판물마저 절판을 하도록 한 것은 죽음을 앞두고도 스러지지 않았던 세간에 대한 비판정신과 칼날 같은 성정이 엿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박수량(1491~1554)의 백비를 떠 올리게 된다.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그의 묘 앞에 있는 비석은 '백비'(白碑)라 불린다. 형조판서, 한성판윤, 우참찬, 중추부사 등 38년 동안 조정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서울에서 변변한 집 한 칸 갖지 못했을 만큼 청렴했다. 6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명종이 청백리의 죽음을 슬퍼해 서해 바다에서 빗돌을 골라 하사했다. 자손들은 "청백했던 삶을 비문으로 쓰면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알려 누를 끼칠 수 있다"며 백비를 세웠다. 임금의 하사품을 무시하지 않고 선대의 유언도 지킨 셈.

청백리의 표상으로 꼽히는 박수량 선생의 백비는 관광객은 물론 정부 부처 공무원들까지 현장학습을 하는 명소가 되었다. 뭔가를 복원하고 만들어야 만이 문화콘텐츠로 남는 건 아니다. 때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면 오히려 상징으로만 남는 것이 훨씬 큰 메시지로 심금을 울린다는 것을 '법정스님생가 복원을 위한 추진준비위원회'나 해남군 당국이 알아야 한다.

김원자(호남대 외래교수 본지고문)

법정(法頂)스님

속명은 박재철. 1932년 10월 8일 해남 문내면 선두리에서 태어나 전남대 상대를 3년 수료한 뒤, 같은 해 통영 미래사(彌來寺)에서 당대의 고승인 효봉(曉峰)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지리산 쌍계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불교신문 편집국장·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및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직접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면서 홀로 살았다.

1994년부터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끄는 한편, 1996년에는 서울 도심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다. 2003년 12월 회주 직에서 물러난 이후 강원도 산골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면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2010년 3월 11일 78세(법랍 5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생전에 수필 창작에 힘써 수십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담담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정갈하고 맑은 글쓰기로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문명(文名)이 높다.

대표적인 수필집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 빈 충만」, 「스승을 찾아서」, 「서 있는 사람들」, 「인도기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