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 정운(鄭運)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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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정운(鄭運)장군
불멸의 신화 … '임진왜란 또 하나의 영웅'
2012년 08월 27일 (월) 11:31:25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정운(1542~1592)은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장으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이다. 

7세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는 글씨를 써서 벽에 붙이고 또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빼어들고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어 싸우기로 결심하더니 28세에 무과에 급제해 북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웅천현감, 삭녕군수를 거쳐 임진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하여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날리다가 부산포 싸움에서 50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임진란 초기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그는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나아가 칠 것을 주장하고 선봉이 될 것을 자청했으며, 옥포해전과 사천해전, 한산도대첩에서 공을 세우고 왜적의 본진이 있던 부산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공의 전공을 높이 사서 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녹도에 사당을 세웠으며 종일등훈(從一等勳)으로서 사액(賜額)을 내리었다. 

또한 사후 60년 되는 임진년(1652년) 효종 때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세웠고, 숙종 7년(1681년) 충절사(忠節祠)라 사액 하였으며 다시 정종(正宗)때에는 병조판서(兵曺判書)와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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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줄기에서 태백으로 다른 한 줄기가 동해안으로 남하하다 돌출 형 지형 산자락이 바다 속으로 급격히 스며드는 곳, 행정구역상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몰운대(沒雲臺)다.

몰운대는 전형적인 육계도로 낙동강하구 최남단에 위치하여 16세기까지는 '몰운도'라는 섬이었으나, 강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에서 왜선 500여척과 싸워, 100여척을 격파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순신장군 함대의 우부장으로 큰 공을 세운 해남 옥천면 출신 정운장군이 선봉에 서서 끝까지 적선을 쳐부수다가 순절한 사적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부산 시민의 날이 음력 9월1일(양력 10월5일)로, 이 날이 1592년 4차출격인 부산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날이자 바로 이날의 주인공 정운장군이 전사한 날이라는 것은 정작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정운장군은 '몰운'이라는 이름에서 '이 곳이 바로 자신이 죽을 자리'라는 운명적 예감을 받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승리를 얻었다고 한다. 

아! 임진왜란 임금도 서울을 버리고…

임진년(1592년) 4월 열나흘, 왜군 대장 코니시 유키나가 등이 거느린 20만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그 날로 부산진이 함락되었고 이어 동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국방에 허술했던 우리로서는 20만 대군이란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병력이었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왜군이 사용하는 조총이란 새로운 무기의 위력이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상태로 세 갈래 길로 나뉘어 곧장 서울로 쳐 올랐다. 

조정에서는 물밀 듯이 올라오는 왜군을 막기 위해 순변사 이일, 도순변사 신입을 내려 보냈으나 역부족이었다. 요충지인 충주가 패함으로써 서울이 위태로워지자 선조임금은 하는 수 없이 피난길을 떠났다. 이 때 도원수 이명운이 한강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군사들이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채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서울을 짓밟고 만다. 

한편 당시 수군 상황을 보면 경상좌수사 박홍, 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 등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지방은 오래전부터 왜적의 행패가 심해 이들 수군 지휘관들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특히 경상도 해안을 맡은 수군이 왜군을 부산앞바다에서 아예 막아주었더라면 임진왜란의 엄청난 수난은 입지 않았으리란 것을 생각할 때 수군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때의 상황을 '난중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옥천면 면소재지인 영춘에서 5km가량 떨어져 있는 대산리에 있는 충절사. 해남읍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려 약 5분 가량 걷다보면 마을 어귀에서 충절사를 찾을 수 있다. 
 


<5월 초삼일, 가랑비가 아침 내내 내렸다. 새벽에 경상 우수사의 답장이 왔다. 오후에 광양현감과 흥양현감을 불러다 이야기하는 가운데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였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며 선봉에 서 적진 돌진

여기에서 말하는 녹도만호가 바로 정운장군이다. 이순신장군보다 세살 위였다. 녹도는 지금의 녹동지역으로 만호는 계급(대령정도)에 해당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그는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나아가 칠 것을 주장하고 선봉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공이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가 눈을 부릅뜨고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전승의 기세를 타고 한없이 밀어붙이고 있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한꺼번에 수륙 양쪽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이처럼 망설이며 출전할 뜻이 없습니까?"라고 하면서 말소리와 안색이 모두 상기되니, 이순신이 기가 질려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공이 이내 선봉으로 자청하여 곧바로 바깥 바다로 나가 도전하였는데, 적병이 대대적으로 이르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뒤로 달아났다. 공이 큰 소리로 부르기를, "여러 장수들이 임의로 진퇴를 하니, 내가 죽을 곳을 얻었다" 하고, 적진을 뚫고 돌진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적군의 배를 격파하니, 적군이 패배하여 달아났다.

임란 초기 적군의 기세가 등등하여 사람들이 감히 그들의 칼날에 맞서지 못하였는데, 수군으로 적병을 공격한 것은 공이 실로 맨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여러 장수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달려가게 된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공이 맨 먼저 전투에 나가 시험해본 공로로 인한 것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공에게 절도사의 벼슬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국조인물考)> 

이 글로 보면 정운의 역할은 전투도 전투지만 이순신장군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했다는 점에서 빛이 난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실상 부산포해전의 패배로 일본군의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서 고전을 하다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도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운장군은 폭탄을 안고 전사한 것으로 묘사돼 사실왜곡논란이 일었지만 그의 애국충절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지만 이순신장군과 정운장군의 관계는 단순히 대장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늘이 조선을 위해 내린 전장의 파트너였다고 할까. 누구보다도 정운을 알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도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장군이 직접 지은 제문을 들어 보자. 

"어허 인생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삶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나니, 사람으로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게 없건마는,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나라가 불행하여 섬오랑캐 쳐들어와 영남의 여러 성들 바람 앞에 무너지고, 몰아치는 그들 앞에 어디고 거침없이 우리 서울 하루저녁 적의 소굴 이루도다. 

천리 관서(關西)로 님의 수레 옮기시고 북쪽하늘 바라보면 간담이 찢기건만, 슬프다!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 

계획을 세우고서 배를 이어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나가더니, 왜적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검은 연기 근심구름 동쪽하늘 덮었도다. 

네 번이나 이긴 싸움 그 누구 공로런고! 종사(宗社)를 회복함도 날 받을 만 하옵더니, 어찌 뜻했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탄환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여!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아올 제 다시 싸워 원수 갚자 맹세 터니, 날은 어둡고 바람조차 고르잖아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평생에 통분함이 이 위에 더 할쏘냐!

(중략)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도 살았도다.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속 알아주리. 극진한 정성으로 한잔 술을 바치노라. 어허! 슬프도다" 

한국과 일본은 도대체 어느 때부터 꼬였을까? 작금의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선조들의 희생과 슬픔을 새삼 떠올려본다. 
 

김원자(호남 대 외래교수, 본지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