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화(劇化)된 극적인 바로크 미술

2009. 7. 28. 02:50카테고리 없음

 

1- 벨기에 안트베르펜시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내부 제단화인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 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는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성당을 찾곤했다.
2-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
3-루벤스의 <성모승천>

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와 화가 루벤스

<성모승천>, 인간세계와의 마지막 이별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것 의미

미술은 언어이다.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에 우리는 그들의 언어의 독해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계기로 삼거나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렇게 영화 속에 미술은 영화의 또 다른 은유나 비유로 활용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왔다. 영화 속의 미술이야기를 통해 영화의 미술의 통섭의 세계를 만나보았으면 한다.

어릴 적 만화는 우리에게 낙원이자 피신처였다. TV가 제대로 보급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는 만화방이 오락과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 후 70년대 들어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오락거리로 자리 잡았고 아이들에게 TV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는 손때 묻은 책장을 일일이 넘기지 않아도 되는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그 중에서도 많은 추억속의 만화영화들이 있지만 그림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에게 <플랜더스의 개>라는 만화영화는 각별하다.

화가가 되려고 했던 가난한 소년 네로가 친구이자 가족 같은 개 파트라슈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누구에게나 가슴 찡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 만 아니라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그가 황홀경에 빠져 보았던 성당 양편의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이 그 감동을 더 해주기 때문이다.

원래 <플랜더스의 개(A Dog of Flanders)>는 많은 멜로 드라마풍의 동화를 쓴 영국의 여류작가 위다(Ouida, 1839~1908, 본명 Maria Louise Rame)가 1872년에 쓴 소설을 바탕으로 1975년 일본의 쿠로다 요시오(黑田昌郞, 1936~ )감독이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추억을 상기해보기 위해 내용을 더듬어 보면 고아인 네로는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Antwerpen)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 다스와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인이 버린 개 파트라슈를 발견해서 식구처럼 살아가게 된다.

파트라슈는 우유 배달하는 네로를 도와 우유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끄는 등 생계를 도우며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림에 소질을 가졌던 네로는 장래에 위대한 화가의 되어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구인 아로아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가까이 지내지만 부유한 곡물상인 아로아의 아버지 코제트는 이를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네로는 풍차화재 사건에 휘말리고, 게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네로와 파트라슈의 생활도 매우 어려운 형편이 된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술대회에서 낙선한 네로는 낙담하여 집으로 향하다 코제트의 지갑을 주워서 지갑을 돌려준다. 이에 코제트는 네로의 정직한 마음씨에 감동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네로는 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은 그가 힘들고 어려울 때면 찾던 곳.

그 곳에는 세 폭 제단화로 중앙에 루벤스의 <십자가에 매달림(The Raising of the cross, 1610-11년, Central panel of triptych altarpiece, 462x341 cm)>과 <십자가에서 내리심(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4, Oil on panel, Central panel of triptych altarpiece, 420x310 cm)>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늘 이곳을 찾아 마음의 평화를 얻고는 했다. 또 <성모 승천(Assumption of the Virgin Mary, 1626, Oil on panel, 490×325cm)>외에도 이 그림의 양 날개에 <면직 Deposition>과 <거만 Assumption> 등이 그려져 있어 루벤스의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는 이 성당의 차디찬 바닥에서 보고 싶었던 그림을 본 행복감에 젖어 황홀한 느낌으로 파트라슈를 끌어안은 채 숨을 거둔다. 왜냐하면 평소에 금화 한 닢을 내야 볼 수 있었던 <십자가에 내리심>을 성당지기 아저씨의 배려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한 아로아와 네로의 청순하고 순수한 우정이 세상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만화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정화시킬 수 있는 마음속 그림 한 점을 갖는다는 것도 얼마나 행복 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1-루벤스의 <십자가에 매달림>
2-벨기에 안트베르펜 시립미술관의 루벤스 방
3-벤스의 동상과 성모마리아 대성당

닛폰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명작극장 1호인 이 만화영화는 방영되는 도중 슬픈 결말이 알려지면서 일본의 많은 어린이들이 네로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975년 1년 동안 방영되었고 KBS에서 1980년대 초 그리고 다시 SBS에서 방영하였고 가장 최근에는 EBS가 2007년에 방영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루벤스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한 바로크 시기 가장 유명한 화가로 그의 작가적 명성은 당시 유럽에 널리 알려져 그림을 그리는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화풍은 장대한 구도,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때로는 극적으로 완성한 작가이다.

특히 특유의 화려하고 운동감이 넘쳐나는 화면은 순간을 포착하는 그의 날랜 눈과 손의 합일을 보여준다. 따라서 때로는 현란하기도 하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붓 터치는 작품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해주며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당시 이미 명성을 얻었던 그는 고향인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스튜디오에는 많을 때는 수백에 이르는 제자들이 넘쳐날 정도로 성가를 올렸던 인물이다.

벨기에의 제2의 도시이자 다이아몬드 가공 산업으로 유명한 안트베르펜은 루벤스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처에 루벤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안트베르펜 성모마리아대성당(O.L.Vrouwekathedraal, 노트르담 성당이라고도 부른다)은 14세기 중반부터 건축하기 시작해서 무려 200년 동안이나 지은 건물로 웅장하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움을 더한다.

1533년 대형화재로 내부에 소장했던 많은 예술품이 훼손되었고 이후 안트베르펜의 시장이자 길드 조합장이었던 니콜라스 로코큭스(Nicolaas Rocockx)의 요청으로 1610~1612년경에 성당 내부 제단화로 루벤스의 작품이 헌정되면서 성당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플랑드르지방을 침공했던 나폴레옹이 이 루벤스의 ‘사람들이 튀어나올 듯’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 반해 프랑스로 약탈해가기에 이른다. 이후 20년이 지나 다시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때 도시 전체가 축포를 쏘고 모든 성당이 종을 울려 명화의 귀향을 환영했다고 한다.

네로가 죽기 직전까지 <십자가에서 내리심>(일명 그리스도의 강림)을 보고 싶어 했지만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은 당시 그림은 귀족계급의 것으로 귀히 여겨진 탓에 공개된 <성모승천>이외의 것을 보기위해서는 돈을 내야했던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로가 <성모 승천> 앞에서 눈을 감는 것은 어머니와 교차되는 성모 승천 자체가 인간세계와의 마지막 이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내리심>에서 주님을 받아 안는 붉은 옷을 입은 젊은 남자는 요한이며 그 맞은 편 청색 옷을 입은 이는 성모마리아이다. 그리고 주님의 시신을 두르고 있는 천의 흰색은 이 두 원색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화면에 힘을 더한다.

또 <매달림>의 경우 로마병사가 일격을 가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참혹하고 비통한 정경이지만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와 흉하게 목을 비틀고 있는 좌우의 도둑은 매우 대조적이라 인상적이다.

하지만 마리아를 비롯한 일행은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바로 평면의 깊이를 조절하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루벤스의 출중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 만화영화 한편으로 인해 성당 앞은 언제나 일본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정작 <플랜더스의 개>이야기를 잘 모른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

 

자료 출처_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