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그림,갤러리를 탈출하다

2009. 7. 28. 01:37카테고리 없음

 


그림이 외출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근엄하게 걸린 그림들이 관람객을 찾아 화려한 나들이를 시작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그동안 그림을 감상하러 미술관을 찾고 싶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 때문에 망설여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전 부터 그림들은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백화점으로, 호텔로, 은행으로, 거리로 뛰쳐나왔다. 뿐만 아니라 육중한 건물의 로비도 갤러리로 변신해 관람객을 보다 친숙하게 미술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갤러리 터치 정해종 관장은 “그림 전시는 공공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의 그림 전시는 광장이나 교회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져왔는데, 요즘 그림의 바깥 외출은 그런 점과 일맥상통한다”며 반겼다.

◇갤러리로 변신하는 백화점=신세계백화점 인천점과 광주점, 그리고 신세계백화점 본관의 아트월갤러리에 이어 최근에는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백화점 7층에 갤러리 아사림이 들어서 백화점을 찾는 고객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본관에 위치한 아트월갤러리는 지하 1층에서 지상 5층까지 엘리베이터홀과 각층 매장 내에 있는 새로운 개념의 전시시설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백화점 고객의 동선을 따라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림을 감상하러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 아트월갤러리에 전시되는 그림이나 사진을 편안하게 바라보며 일상생활의 따분함을 날릴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아트월갤러리는 지난 2007년 2월 개관전 ‘Woman in Photography전’을 시작으로 ‘주명덕 사진전-Vintage Print’(2007년 4월), ‘일상으로의 초대전’(2007년 7월), ‘숲을 거닐다전’(2007년 9월), ‘Meta-Space전’(2007년 11월), ‘결과 시김의 정신-조선목가구와 한국현대추상미술전’(2008년 2월)을 열었으며, 오는 22일까지 ‘공간 다르게 보기전&Young Photo-흔들기, 비꼬기, 뒤집기전’을 개최하고 있다.

신세계갤러리 황호경 팀장은 “아트월갤러리 전시로 백화점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천편일률적인 백화점의 디스플레이에서 오는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는데다가 엘리베이터홀에서 잠시 쉬면서도 평소에 만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고객들의 반응이 대단히 좋다”고 말했다.

◇호텔에 들어선 갤러리=휴식과 비즈니스로 상징되는 호텔에도 갤러리가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사실 호텔은 넓게 탁 트인 로비와 화려한 실내 장식 등 갤러리로 활용하기에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세종호텔 내 세종갤러리만이 그동안 유일하게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지난해 7월 부산 해운대에 있는 노보텔 앰버서더 부산의 4층에 국내 굴지의 화랑인 가나아트가 부산점을 내면서 호텔들이 잇따라 갤러리를 유치해 휴식 공간을 넘어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과 리츠칼튼호텔이 1층 로비에서 전시를 하는데 반해 지난 5월 개관한 서울시 중구 라마다 호텔&스위트 서울센트럴 내 갤러리 터치에서는 ‘터치 더 스페이스전’을 열고 있다. 특히 갤러리 터치는 전용 갤러리 이외에도 주요 객층 8개 층을 활용해 그림을 전시, 호텔을 찾는 고객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 주고 있다.

◇미술전시장으로 변신하는 건물 로비=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GS타워 1층 로비에는 아프리카 미술인 소냐 조각이 일반인들을 반기고 있다. 또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있는 흥국생명 건물 1층 로비에는 백남준, 강익중, 이불, 최우람, 줄리안 오피, 마리코 모리 등 국내외 유명 작가 10명의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흥국금융그룹이 새 CI를 선포하면서 그 일환으로 건물 로비에서 미술전을 열게 된 것이다.

호텔과 백화점이 갤러리로, 건물 로비가 전시장으로 변화하자 미술애호가들의 발걸음이 신이 났다. 우리가 자주 찾는 공공장소에서 그림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제된’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온 그림의 외출이 현대인의 마음을 살찌운다.

■신세계백화점 아트월갤러리,한국현대사진전

지난 5월 한국의 멋을 담은 고가구와 추상회화의 조화를 보여준 신세계백화점 본관의 아트월갤러리(02-727-1542)는 오는 22일까지 한국 현대 사진전으로 백화점 고객들을 맞는다. 이번 전시는 사물의 재현보다는 사물에 대한 해석과 표현으로 장르를 확산하고 있는 현대 사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익숙하고 당연한 이미지 환경의 규범적 틀에 균열을 내거나 이탈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작품 8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두 파트로 나눠져 각층 엘리베이터홀 아트월을 중심으로는 '공간 다르게 보기전'이, 통로 아트월을 중심으로는 'Young Photo-흔들기, 비꼬기, 뒤집기전'이 개최되고 있다.

'공간…'은 고현주, 구성수, 백승우, 최원준, 한성필의 작품이 전시된다. 이들 작가들은 대상공간이 기존에 확보하고 있는 서사를 날카롭게 집어내거나 각자 독특한 방법과 연출로 공간을 해석하고 왜곡하여 공간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념과 이미지의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뒤집기전'은 구성연, 김규식, 김천수, 김희정, 박현두, 방명주, 신은경, 이민호, 이정, 이정록이 참여한다. 사진의 해석력과 표현력의 범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 전시는 현상과 사물, 개념을 뒤집어보고, 비틀어보고, 흔들어 봄으로써 사진 대상의 물성을 변형시키고 새롭게 이미지화하여 작가의 의도와 관점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

예컨대 구성연의 팝콘 시리즈는 나뭇가지에 팝콘을 하나하나 달아 마치 매화꽃이 피어있는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관객은 그것이 팝콘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실망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오게 되는데, 현실과 이상, 실재와 허상이라는 이중적인 경계가 시각적 체험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진평론가 한금현씨는 "사진의 대상과의 관계를 달리 설정하고 사진 매체의 다양한 특성을 적극적으로 전략화하는 이들 작가들은 다양한 사진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는 동시에 예술로서의 사진이 지녔던 미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라마다호텔 갤러리 터치,터치 더 스페이스전

아프리카 현대미술 전문 갤러리인 터치 아프리카(관장 정해종)가 서울시 중구 순화동 라마다 호텔&스위트 서울센트럴로 이전, 지난 5월 오픈한 갤러리 터치(02-776-7177)는 오는 30일까지 '터치 더 스페이스전'을 개최하고 있다.

갤러리 터치는 본 전시장 이외에도 호텔의 25개 층 가운데 주요 객층이라 할 수 있는 6층부터 13층까지 8개층의 벽면(총 길이 30m 내외)을 모두 활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 개 층 전체에 작가 한 사람의 작품 10여점을 전시함으로써 8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는 소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일반 갤러리 공간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라는 점에서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에 투숙하고 있는 고객들의 반응이 좋다는 게 호텔측의 설명이다.

그동안 호텔은 이른아침 투숙객이 체크아웃하고 나면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고즈넉한 적막감이 흐르는 죽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객실 로비는 사생활 보호 등의 이유로 어두컴컴한 나머지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객실 로비에 그림을 내걸자 호텔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림을 따라 한층 밝아졌다. 죽은 공간에 세련된 문화와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음으로써 보다 활기찬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다.

물론 호텔 내 갤러리가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있다. 휴식과 비즈니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호텔에 갈 수도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개관 기념전에는 박훈성, 이강욱, 이열, 장혜용, 정현숙, 주태석, 지석철, 한지선 등 한국화의 현대적 해석을 이뤄낸 작가 8명이 참가하고 있다.

호텔에 그림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는 직장인 이동기씨(42)는 "서울처럼 인구가 밀집돼 있는 대도시에서 대중적 문화공간의 확보가 쉽지 않은데 이처럼 간단한 인식의 전환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이 만들어져 너무나 반갑다"고 말했다.

■해운대 노보텔 가나아트부산,로베르 콩바스전

부산 해운대 노보텔 호텔 4층에 위치한 가나아트부산(051-744-2020)은 호텔 갤러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전시 면적만 496㎡(150평)이고, 또 작가 세 명이 머물며 작업할 수 있는 아뜰리에가 호텔 내에 있다.

오는 29일까지 개최되는 '로베르 콩바스전'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이어 마련된 전시로서 프랑스 현대 회화를 선도하는 로베르 콩바스의 자유구상회화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자유구상회화란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자주 비교되어 온 콩바스가 창시한 회화기법으로, 1970년대의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반발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자유분방하게 그린다.

이번 전시에는 '담배 피는 운전사와 분홍 코끼리' '나무 트럼펫' '베이스 맨' '여신 이시스 비너스' '환경주의자 말 제이슨' '사자 인간' 등 회화·조각·도자기 총 60여점을 선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경남도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진 바 있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최신작을 중심으로 이제까지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게 전시한다.

그의 작품 소재는 신화, 종교, 우화, 역사, 만화, 록음악 등 폭넓고 다양하다. 그리고 표현은 즉흥적이고 거침이 없으며, 색채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하다. 특히 콩바스는 손에 닿는 것이라면, 침대시트, 간판, 악기, 가구 할 것 없이 어떤 것에든지 그림을 그린다.

미술평론가 장 프랑수아 모치코나치에 따르면 콩바스 작품의 일반적인 특징은 격렬함과 순수한 색채로서 야수파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아이들의 전쟁놀이와 어른들의 전쟁,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인에 대한 특별한 사랑 등 특정 주제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작가는 "내 그림은 피카소나 미로의 작품들과 만화그림, 그리고 뒤뷔페나 코브라풍의 거칠게 표현된 그림의 혼합이다. 내가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구상적이지만, 내 그림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추상적이다"고 말한다.

/noja@fnnews.com노정용기자

■사진설명=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걸려 있던 그림들의 화려한 외출이 시작됐다. 그림들은 호텔로, 은행으로, 백화점으로 나들이를 해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마련한 아트월갤러리.(위) /사진=김범석기자

부산 해운대구 노보텔 앰버서더 호텔 로비에 전시된 그림과 사진. 이 호텔 내에는 '갤러리 가나아트 부산'이 자리하고 있다.(아래)

 

자료 출처_파이낸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