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나라에 `백남준`이 없다

2009. 7. 28. 03:07카테고리 없음

백남준의 나라에 `백남준`이 없다

  • 미술 문화 산책|2009/05/20 18:07

 

주요 연구자료 담긴 아카이브, 미(美)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서 소장키로

현대미술의 지평을 바꾼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 연구의 핵심이 될 '백남준 아카이브'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으로 가게 됐다.

전 세계 미술뉴스를 다루는 인터넷 신문인 아트데일리(artdaily.org)는 최근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이 백남준의 아카이브를 소장하게 됐다"면서 "스미스소니언은 아카이브의 카탈로그를 정리하고 백남준 연구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도 백남준 아카이브의 스미스소니언행(行)을 알리면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아카이브를 가져가는 것은 미술계에서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다"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남준 아카이브에는 그의 중요 작품으로 꼽히는 〈과달카날 레퀴엄〉과 1003개의 TV 모니터로 보여준〈The More the Better〉 등을 비롯해 초기 작품에 대한 계획서와 현대음악의 거장(巨匠) 존 케이지와 주고받았던 편지, 자신의 예술관을 담은 기록 등이 망라돼 있다.

아카이브는 백남준이 타계한 이후 그의 조카인 겐 하쿠다가 관리해왔다. 겐 하쿠다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 휘트니·구겐하임·스미스소니언·게티 미술관으로부터 아카이브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제안서를 받은 뒤 백남준 부인의 동의 아래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으로 최종 결정했다.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으로 결정된 데에는 이곳의 컨설팅 큐레이터 존 핸하트의 역할이 컸다. 핸하트는 1982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 전시를 기획했고, 2000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어 백남준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일조했다. 핸하트는 "백남준 아카이브야말로 20세기 말 미술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될 자료들"이라고 흥분했다. 앞으로 일반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백남준 아카이브에 접근하려면 선약을 통해야만 가능하게 된다.

백남준이 시작한 미디어 아트의 주도권을 독일이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카이브마저 미국으로 넘어가 백남준에 대한 한국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게 됐다. 특히 백남준 연구센터의 역할을 기대하며 작년에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가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며 "백남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연구할 시간을 허비해왔는데 지금이라도 우리가 먼저 깊게 연구해 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홍콩과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한 뒤 아방가르드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을 찾았다. 1959년 자신의 친구였던 존 케이지에게 비디오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비디오 아트에 첫발을 내디뎠고 1963년 독일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최초의 비디오 아트전(展)으로 기록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보이면서 '비디오 아트 창시자'란 이름을 얻었다.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확립했으며 그의 예술에 대한 비전은 현재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료 출처_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