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 과학자가 사랑한 화가

2009. 7. 28. 02:51카테고리 없음

파울 클레, 과학자가 사랑한 화가

  • 미술 문화 산책|2009/02/06 23:45

 


[한겨레21]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③ 파울 클레]

생성과 소멸 드라마를 그리다

파울 클레로부터 시작된 예술적 창세기,

‘사물 생성의 마법’을 미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색 배치로 기록해


[진중권]

정치적 보수는 문화적으로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가? 나치 정권이 탄압한 것은 유대인과 좌익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현대미술마저 ‘퇴폐미술’로 낙인찍었다. 현대미술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기 위해 나치가 조직한 ‘퇴폐미술전’(1937)에는 파울 클레의 작품이 일곱 점이나 들어 있었다. 거기서 그것들은 ‘광기와 정신병’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됐다고 한다.

정신병자의 그림, 근원적 시각

클레 자신이 빌미를 주었을까? 어느 잡지에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민속학 박물관이나 아이들의 방에서 볼 수 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바로 정신병자들의 그림이다.” 그가 자연부족, 어린이, 정신병자의 그림에 주목한 것은, 물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치에게 이는 진화를 거스르는 퇴화의 증거일 뿐이었다. 나치의 생물학적 세계관 속에서 퇴화는 곧 퇴폐를 의미했다. 젊은 시절 클레의 일기장에 적힌 구절은 그 힘든 시절 이 퇴폐예술가를 지탱해준 힘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pour ne pas pleurer) 그린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클레에 따르면 예술에는 ‘근원적인 시작’이 있다. ‘근원적인 시작’이란 한마디로 창세를 말한다. 예술의 과제는 이 ‘창조 과정의 기적을 가시화해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는 사물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생성과 소멸의 운동. 이 ‘사물 생성의 마법’을 클레는 미세한 움직임과 색의 미묘한 배치로 기록한다.

“모든 생성의 바탕에는 운동이 깔려 있다.” 우주는 움직임의 총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객선을 타고 간다고 하자. 이 사건은 갑판에서 그의 움직임, 배의 전진운동, 물결의 움직임, 지구의 자전, 그 위 달과 별들의 회전으로 이뤄진다. 한마디로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 단순한 사태조차 ‘우주 속 움직임들의 조합’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레싱은 회화를 공간예술로 간주했으나, 클레가 보기에 “공간 역시 시간적 개념이다”. 정지된 회화로 어떻게 운동을 기록할 수 있을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가령 지진계(seismograph)는 운동을 공간에 기록하지 않는가. 실제로 클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섬세한 선의 움직임은 지진계를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생성과 소멸의 드라마를 기록한 우주계(cosmograph)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이렇게 대상의 재현보다는 지각의 조직화를 지향하는 것이 현대예술의 특징이다. 하지만 클레가 이 말을 했을 때, 거기에는 이런 일반적 의미를 넘어서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클레는 자신의 말을 저 유명한 물리학 원리,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연결한다.

“지금은 가시적인 사물들의 상대성이 분명해졌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 전체에서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진리들이 엄청나게 많이 잠재돼 있다. 사물들은 더 넓고, 더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

실현되지 않은 5개 눈의 가능성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우주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의 총체이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주사위를 던지면 실현되는 것은 하나의 눈이지만, 주사위에는 실현되지 않은 다섯 개의 가능성이 있다. 클레는 이 실현되지 않은 우주의 잠재성을 풀어 전개해 가시화하려 한다.

칸딘스키처럼 클레 역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솔리스트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기도 했다. 클레가 “음악적 구조물을 조형적인 것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언젠가 지인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드로잉이 음악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추정했을 겁니다.”

클레는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쇤베르크의 현대음악보다는 모차르트, 베토벤, 특히 바흐의 고전음악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의 미적 취향이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전음악에서 그의 주목을 끈 것은 푸가의 기법과 같은 폴리포니 구조였을 것이다(폴리포니는 음악에 도입된 공간 구조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폴리포니에 주목한 데에는 우주론적인 이유가 있었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주제가 동시에 공존하는 현상은 음악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는 모든 전형적인 사물들이 한 장소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그 어느 곳이나 도처에 뿌리박고 유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고전음악의 폴리포니는 음악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원리라는 것이다.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문 예술가에게 문학과 미술의 경계는 문제되지 않았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클레는 창작시도 꽤 남겼다. 클레의 미술 작품에 붙은 제목은 고전예술에서처럼 그림 이미지의 동어반복도 아니고, 현대미술에서처럼 무의미한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와 상호 작용하는 텍스트로 봐야 한다. 그는 제목 붙이는 일을 종종 ‘세례’에 비유했다.

르네상스 이래로 텍스트는 이미지에 제목으로 붙고, 이미지는 텍스트에 삽화로 붙어야 했다. 하지만 클레의 그림에서는 종종 문자나 기호가 조형적 요소와 병존한다. 텍스트 전체가 그대로 이미지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화살표는 그림을 텍스트처럼 선형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하는 듯하다.

클레는 문자언어를 형상언어처럼 사용했다. 실제로 그는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자나 기호,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으라고 요청했다.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으로 관객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침묵의 장르에 속하던 그림은 음성회화(Laurmalerei), 즉 소리 나는 회화가 된다.

그림 속 문자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

칸딘스키와 달리 클레는 정신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묘사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 “대상은 세계였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아니지만.” 그의 작업은 외부의 ‘재현’도 아니고, 내면의 ‘표현’도 아니었다. 클레는 자신을 영매로 생각했다. “작품은 저절로 발생한다. 그래픽은 열매처럼 무르익어 저절로 떨어진다. 나의 손은 내가 아닌 어떤 의지의 도구다.”

클레의 작품에는 나뭇잎, 과일 껍질, 성게, 해마, 해초, 산호와 나비와 비슷해 보이는 환상적 형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주가 가진 잠재성의 총체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실현되지 않은 대안적 세계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클레는 바로 그것을 가시화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서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은 하나로 어우러진다.

클레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스스로 유파를 창시하지도 않았다. 형식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 눈에는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으로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뒤섞인 잠재적 세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클레는 이미 디지털 생성의 시대를 예고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이 기사는 이미 발표했던 원고를 수정·가필한 것입니다.


초끈이론을 캔버스에

파울 클레, 21세기 중요한 예술적 화두 ‘음악적 미술’을 구현한 20세기 가장 무모했던 화가


[정재승]

내가 아는 한 신경생물학자는 원숭이의 시각피질에 전극을 꽂은 뒤 다양한 자극을 보여주면서 신경세포의 반응을 측정하는 연구를 하는데, 그는 종종 파울 클레(1879~1940)의 동물 그림을 시각자극으로 사용하곤 했다. 원숭이도 현대미술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날 그는 나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파울 클레의 작품 중 최고는 <지저귀는 기계>(Twittering Machine·1922)라고 알려주었다. 이유는? ‘원숭이도 흥분하게 한 명작’이라나!

내가 아는 한 면역학자는 파울 클레가 말년에 5년간 앓았던 경피증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피부경화증이라고도 불리는 경피증은 피부결합섬유가 팽팽해져서 피부가 점점 딱딱해지는 피부질환을 말한다. 클레는 처음에는 팔다리가 저리고 후끈거리다가 점점 피부가 딱딱해지는 증세에 5년간 시달렸다. 나중에는 가슴에 부종이 생기고 얼굴 피부도 딱딱해지면서 표정을 짓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신체 변화는 그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이 면역학자는 <고가다리의 혁명>(Revolution of the Viaduct·1937)을 포함해 클레가 남긴 말년의 작품들이 그토록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은 “유머러스하고 즉흥적이었던 그가 질병을 통해 좀더 진지하고 심오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스위스에서 태어난 독일인 화가 파울 클레는 20세기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다. 음악을 먼저 공부했지만 뒤늦게 미술을 접하면서 음악이나 여행을 통해 얻은 창조적 영감을 유머러스한 데생과 단순화된 수채화 형태로 표현하곤 했다. “선이란 점이 떠나는 산책이다”라고 할 정도로 즉흥성을 강조하는 그였지만, 한때 바우하우스의 미술이론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1세기를 전망하게 하는 아이콘’으로 파울 클레를 꼽은 데에는 ‘그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나를 현대미술의 매력에 홀딱 빠지게 한 작가’라는 개인적인 사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는 그가 자연과 우주, 그리고 과학에 오랜 관심을 가진 작가라는 데 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시도했던 음악적인 미술, 다시 말해 ‘음악과 미술의 결합’이 앞으로 21세기의 중요한 예술적 화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바람대로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던 클레는 졸업을 앞두고 자신의 진로를 ‘회화’로 바꾼다. 데생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그림에 몰입한 뒤에도 오랫동안 음악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열정을 바쳤다. <인벤션>(Invention·1905) 연작 시리즈나 <팀파니 연주자>(Kettledrummer·1940) 등 음악과 관련된 주제와 형식으로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했다.

그래선지 클레의 우주적 공간에는 리듬과 화음, 그리고 멜로디가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중 클레의 <우주적 구상>(Cosmic Composition·1919)은 천체물리학자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화가의 본령이 독창적인 회화언어를 사용해 사물의 본질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라면, 클레의 <우주적 구상>에는 21세기 입자물리학자들이 찾아낸 ‘우주의 본질’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음악이 들리네

우주의 구성입자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던 입자물리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의 거시적인 연속성과 양자역학의 미시적인 불연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20세기 말 ‘대담한 가설’ 하나를 세운다. 이 우주가 11차원(혹은 26차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안에 담긴 물질은 ‘끈’ 모양의 기본 입자가 기타줄처럼 진동하는 유형에 따라 고유한 성질을 나타내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을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고 부르는데, 우주를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 보는 빅뱅이론(Big Bang Theory)과 달리, 영원히 성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세계로 우리 우주를 파악한다. 불꽃놀이를 하듯 폭발하고 끊임없이 가지치기(bifurcation)가 산재해 있는 클레의 <우주적 구상>에는 수많은 초끈들이 연주하는 ‘우주 교향곡’이 장중하게 연주되는 듯하다.

21세기는 과학자들이 초끈이론의 대담한 가설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100년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작은 블랙홀’을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며, ‘우주 초기 상태’를 시뮬레이션해보는 실험도 시도할지 모른다. 그 과정을 통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클레의 <우주적 구상>은 과학자들에게 새롭게 읽히고, 다시금 해석되는 작품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화가는 ‘붓으로 우주를 서술하는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매 순간 증명하면서.

칸딘스키와 클레는 몇 년간 서로 이웃으로 살았다. 이 두 추상화가의 공통점을 꼽자면, 색을 소리처럼 사용해 그림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연주하고 싶어했다. 김광우가 쓴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펴냄·2007)에는 이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칸딘스키가 쓴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키보드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연주하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

아마도 이 말은 클레의 작품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게다. 칸딘스키의 그림처럼 화폭에 악기와 악상기호가 난무하진 않지만, 그 역시 음악과 미술이 하나로 결합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소리가 들리고, 영감 어린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살며시 그의 작품이 떠오르는 경험을 그는 우리와 진정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시도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더라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 내 주제 넘은 생각이다. 음악과 미술은 그의 작품에서 고루 섞여 혼합물이 되었지만 아직 화합물이 되지는 못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공감각적인’ 주제는 21세기 현대 예술에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다. 화가들은 지난 5천 년간 원근법을 이용해 2차원 캔버스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실적 묘사로 세상을 통째로 담아내려고 했으며, 빛이 주는 인상을 캔버스에 녹여내려 애썼다. 간단한 도형과 추상으로 세상의 본질을 화폭에 추스르려고도 했으며, 자연의 움직임이나 화가의 붓놀림으로 운동과 시간, 재질과 콘텍스트를 표현하려고도 했다.

이제 현대미술가는 우주를 캔버스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넘어서 우주를 통찰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 안에 담아내려 노력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점·선·면’뿐만이 아니라 소리·냄새·맛·터치가 인지적 과정을 거쳐 어떻게 우주를 구성하는지, 우리의 기억과 주의, 감정과 의식이 어떻게 우주를 재형성하는지 연필로 스케치하고 붓으로 채색해야 할 것이다. 파울 클레는 바로 그 첫 단추를 끼운 ‘20세기 가장 무모했던 화가’라고나 할까.

자신을 잘 알았던 늙은 불사조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대개의 경우 창조의 핵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던 그는 자신을 너무도 정확히 이해했던 <늙은 불사조>(Aged Phoenix·1905)였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자료 출처_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