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해금 오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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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해금 오달운  땅끝해남의 인물자원 

2012/10/30 12:54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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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해금 오달운
2012년 10월 29일 (월) 10:49:18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해금은 실학운동의 전성기인 18세기 말보다 앞서 아직 미개척기인 18세기 초에 벌써 진보적인 사상을 품고 사회개혁 사상을 제시한 선각한 실학자였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캠프에서 쏟아져 나온 정책들에 관심이 가는 요즘이다. 워낙 불황이 오래가고 서민들 살기가 팍팍하니 혹시 눈에 띄는 새로운 정책이 나오지 않는지 귀가 쫑긋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후보자신의 철학과 경륜에서 나온 것이 아닌 정책팀에서 이것저것 짜 맞춘 선거용 정책이란 느낌에 전혀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럴 때는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간 선현들의 예지와 시대를 관통해 탁월한 목민관을 제시했던 학자들의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실학의 아버지'로 이웃 강진에 유배와 살면서 수많은 저술을 완성하고 민중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다산 정약용선생을 떠올린다. 그가 머물면서 사상을 키웠던 다산초당은 요즘 들어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적이 끊길 새가 없다. 그러나 정작 해남사람 해금 오달운(海錦 吳達運, 1700∼1747)공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산 이전에 실학의 씨를 잉태했던 해금 오달운, 오늘은 그를 불러 내 우리시대의 모순을 풀어낼 방책을 들어보자.

"과거제도가 건전한 학문풍토 망치고 있다"

조선조 500년은 참으로 편할 날이 없는 세상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고 양난에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국가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간 신봉해 온 이념과 사상, 통치 등에 회의를 가졌다. 조선은 불교를 버리고 긴 세월동안 유교를 발전시켜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지만 국가 존립의 위기 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국가 위기의 시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 실학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 지식층 사회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모순과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개혁의지가 넓게 퍼져갔고, 공통적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모색하는 사회개혁운동으로서의 실학사상이 싹을 터 간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를 양반관료사회라 한다. 양반관료가 그 사회의 주체요, 지배자란 뜻이다. 그 시절 최고의 가치는 입신양명, 곧 고급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관직에 대한 열망은 상상을 초월했다.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는 것도, 사랑을 이루는 것도 관료가 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마치 오늘 날 고시열풍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고시열풍은 고용구조가 불안한 자본주의사회에서 공무원이 갖는 직업의 안정성, 신분의 수직상승, 권력과 돈에 대한 기대 등이 얽혀 빚어낸 결과다. 어떻게 보면 고시열풍은 한국사회의 병리적 요소와 모순이 총집결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사대부들도 거의 대부분 출세를 위한 학문을 했지, 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 그 과거제도를 부정하고 "과거 자체가 건전한 학문풍토를 망쳐놓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바로 해금선생이다. 

제자들에 떠밀려 응시한 시험서 1년에 5도장원, 천재성 입증

해금은 해남군 계곡면 흑석산 밑 용지리에서 오시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직 책을 읽기도 전, 이웃집 감 속에 까만 점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어린 해금은 감나무에 돌이 박혀 있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보니 과연 그러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이나 그 근원을 파는 성격이 있었다. 6세에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무렵 영암에 은거하고 있던 김순행을 찾아 처음 학문을 익혔다. 총명함이 뛰어나 약관의 나이에 벌써 유가의 경전을 섭렵, 향시에 급제했으나 과거에 대한 태도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과거 문체가 고루해서 학문의 풍토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고루한 문체를 써서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해금의 탯자리인 계곡면 흑석산 아래 용지리에는 그를 모신 용지사<사진>가 있으며 산이면 대진리에 묘소와 제각이 있다. 
 
30세 무렵 나주로 이거해서 서당을 열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때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 당시 문하생 이행유는 그의 교육적 공로를 이렇게 적었다. "그간 10년 동안 인문이 날로 쇄신하고 사업(士業)이 크게 열려 집집마다 글 읽은 소리가 들리고 마을에 학문하는 습속이 이루어지게 되어 비록 서민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스스로 분발케 하였으니 공(公)이 나주에 끼친 교화, 성취에 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혹의 나이 40이 되면서 그의 생활태도에 큰 변화가 일었다. 끈질긴 제자들의 권유로 영조16년(1740년) 41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응시, 감시양장(監試兩場)에서 각각 장원을 하고 동당시(東堂試)의 논(論)·책(策)에서도 장원에 오른다. 

또 대과(大科)인 회시(會試)에서도 장원을 해 1년에 5도장원(현재의 회계사, 변리사, 외무고시, 행정고시, 사법고시)을 모두 휩쓴다. 임금 앞에서 보는 마지막 과거시험인 전시에서도 병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그 명성은 온 나라에 알려진다. 5도장원은 율곡 이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재상가의 서녀를 첩으로 맞으라는 권유며, 집권세력의 당인이 되라는 권유, 그리고 권세가에 청탁하라는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일시 승정원 사관을 거쳐 외직인 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영조22-1746)이란 하관말직으로 지냈다. 그러나 1년도 못 미쳐 재직 중 47세의 나이에 더위로 갑자기 사몰하였는데 곤궁한 살림에 10세의 아들하나만 남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호남책(湖南策)' 저술 통해 호남푸대접 분석도

그는 47년이란 짧은 생을 살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현실사회의 갖가지 비리와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고발하였으며 나아가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반드시 개선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특히 조세·군역·구민책 등 주위 농민생활에 직접 관련된 문제에서부터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이기론·군사·지리·음양오행 등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것이었다. 

해금의 저술에는 경제적 실학사상을 담은 '상제상서(上帝相書)'와 '공도회의(公都會議)', '가주전변부의(加鑄錢便否議)' 등이 있다. '공도회의'에서는 과거제의 시행상 모순과 그에 따른 폐단을 지적 특히 농번기인 6월에 과거를 실시함으로써 갖가지 폐해가 작출 되고 있다하여 속히 그 시기부터 바꿔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으며, '왕패략호남책(王覇略湖南策)'에서는 사회개혁 포부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9개 조목으로 되어있는 '왕패략'에는 교육, 군사, 사회, 토지에 대한 개혁의지가 밝혀져 있다. 

'호남책'에서는 18세기 초 호남지방의 민정실태를 소상하게 밝히고 행정상의 작폐와 모순이 가장 혹심함을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호남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오래지만 아직 그와 같이 기미가 없는 것은 국가가 호남을 푸대접해서가 아니라 호남사람들 가운데 중앙 요직에 자리한 사람이 드물어 문제점을 건의하지 못할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라며 호남이 대접받지 못한 까닭을 분석하기도 했다. 

교육제도에 대한 개혁에서 해금은 단 한 줄의 글도 읽지 않은 자가 그 이름을 칭탁(稱託)하거나 오륜의 조건도 모르면서 성균관에 적을 두어 학문한다는 자들이 있으니 극히 한심스럽다고 하여 부실한 교육풍토를 꼬집었다. 또한 재상의 자제나 일반 서민의 자제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한 조건에서 차이 없이 교육되어져야 한다며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하는 한편 국가기강을 세우는 것이 개혁의 기초라고 강조하며 인재를 기르는 기본인「소아교육론」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저술에 담긴 사상을 평가해볼 때, 아직 실학운동의 미개척기인 18세기 초에 그만큼 진보적인 사상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다. 문제를 파악하고 확실한 대안을 제시한 해금의 사회개혁사상은 시대를 리드해야 할 정치지도자들이나 오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금 오달운의 실학사상과 선각자적 면모를 조명하고 평가하는 작업과 아울러 다산초당과 연계하여 후세들에게 교육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일이 지금 필요하다. 

(김원자 호남대 외래교수. 본지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