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동양사학자 閔斗基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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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양사학자 閔斗基 교수  땅끝해남의 인물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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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양사학자 閔斗基 교수
"역사는 유장한 것,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2012년 12월 31일 (월) 11:46:48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한국 동양사학계의 거두로 생전에 동아시아 관련 수많은 저작물과 논문을 발표했던 민두기 교수는 중국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은 목포대학교에서 열린 '2010 민두기기념문고 학술세미나' 행사 사진. 
 
  
 
 민두기 교수 
 
한해가 끝나는 12월의 막바지에 서 있다. 다가올 5년을 이끌어갈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도 끝나고 새 정부에 거는 기대와 함께 일말의 불안도 교차되는 시점이다. 지난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이란 말로 우리가 힘겹게 다져온 지난 시간들에 대해 폄하를 하면서 새 역사를 쓸 것처럼 얘기했지만 돌이켜보면 이 정국처럼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가랑잎처럼 흩어졌다 모았다하는 시류에 너무 절망하지 말자. 너무 환호하지도 조급해 하지도 말자. 역사는 유장한 것,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이란 더욱 유장하고 끈질긴 것이다. 일찍이 한국 동양사학계의 거두 민두기 교수(1932~2000, 계곡면 당산리 출생)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20세기의 역사의 왜곡은 '시간과의 경쟁'에서 조급증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피력하였다. 격변하는 대선정국과 연말에 우리고장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 민두기교수의 시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 

중국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석학
  
 
 교수의 마지막 저작물이 된 '시간과의 경쟁'.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병상에서 쓴 출판후기를 통해 민 교수는 책 이름이 '근현대 동아시아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에서 따 왔다고 했다.  
 
민두기 교수는 1997년 12월 8일 그 해 첫눈이 내리던 날, 자신이 30여년 넘게 몸담았던 서울대를 떠나며 가진 고별강연을 이렇게 끝맺었다고 한다. "(시대적) 공동인식(共同認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사연구자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장기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역사가는 고독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독한 역사가가 많이 존재하는 사회가 진정 깨어있는 사회다. 나(민두기)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믿는다. 하지만, 그 역사의 진보는 보다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연구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사실(史實)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 지성사의 한 장을 장식한 것으로 평가받는 걸출한 역사학자 민두기 교수, 그의 활동영역과 학문연구의 방향이 워낙 전문적인지라 고향사람들에게는 낯설지만 우리는 한국역사학계의 거목을 배출한 고장으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리고 우리도 역사의 진보를 믿어보자. 

민두기 교수는 중국 근대화 연구 분야에 있어서 한국에서의 중국사 연구를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린 석학으로 그의 저서들은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에서도 필독서로 꼽힌다. 중국의 한대사(漢代史)에서 시작하여 청대사· 근대사·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연구영역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근대화'연구 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 특히 1989년 저술한 '강좌중국사'는 그와 제자들이 각 주제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를 정리한 내용으로, 단일학과 동문 연구자만의 것으로는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저작이라고 한다. 또한'중국근대사연구'는 한·중관계사 중심이던 국내 중국학의 전통을 탈피하여 중국사 내면으로 파고든 역작으로 평가된다.

"모든 길은 중국으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China)."는 CNN특집 제목처럼 최근 G2로까지 급부상하며 한반도의 명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 연구와 대처에 그는 일찍이 눈을 떴고,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학문적 태도·후학양성에  엄격했던 동양사학의 총통

민두기 교수는 1932년 11월 2일 계곡면 당산리 태인마을 824번지의 외가에서 태어나 본가인 해남읍 백야리 542번지에서 자라났다. 해남에서 해리 심상소학교를 마쳤고 6년제 광주 서중학교에 졸업한 다음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74년 중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1969년부터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연구원,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난징대학교(南京大學校) 민국사연구중심 객좌교수 등을 지냈다. 1998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주요저서로 '중국근대사연구', '중국사 시대구분론', '중국의 역사인식(상·하)', '강좌중국사(전7권)', '중국 초기혁명운동의 연구', '현대중국과 중국 근대사', '시간과의 경쟁' 등의 학술서와 수필집 '한 송이 들꽃과 만날 때'등이 있다. 

  
 
 민두기 교수의 자필 묘비글 '골호자명(骨壺自銘)'. "...제자들의 인사치레 말에도 감격했던, 여린 성품의 범부(閔斗基, 1932.11.2-2000.5.7)가 평생 그렇게 그리워했던 하나님과 먼저 간 딸 시원에게 가기위해 이곳에 무쳤다"는 내용이 애잔하게 와 닿는다. 
 
이같은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1986년 출판문화상 저작상, 1988년 학술원상 저작상(인문사회과학 부문), 1992년 금호학술상, 1994년 중앙일보 학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별명이 '동양사학의 총통'이었을 만큼 학문적 태도나 후학 양성에서 엄격했고 자신의 죽음마저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부음이 뒤늦게야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묘비명도 써 두었던 엄격한 사람이었다. 옛사람들의 습관의 하나로 퇴계 이황도 죽기 전 4언 24구의 글을 지어 자신의 묘비에 쓰도록 했다는데 스스로 묘비명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하겠다는 뜻.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땐 감상에 치우쳐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장황하게 쓸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에 대해선 엄격했고 그런 자세는 학문연구의 과정에서도, 제자관리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민두기스쿨로 일컫는 학맥과 훌륭한 후학들을 많이 두었다. 

민 교수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목포대학교에서 민 교수의 10주기를 기념하는 '2010년 민두기 기념문고 학술세미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조영록 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민두기의 호적(胡適)연구'는 '민두기 자신을 탐색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며 "선생의 연구 자세나 방법 등이 그(胡適)와 매우 비슷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알려지다시피 중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사상가이며 학자였던 호적은 서구의 사상이 중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 같은 추상적 원리에 의존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라며 중국 전역이 흥분에 들끓어 전투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했던 중국 지성의 대명사였다. 

삶의 지혜와 지적편력 보여주는  저작물 재조명을

민 교수가 살았다면 지금의 한중관계, 혹은 시국관을 어떻게 피력했을까? 생전에 민 교수는 "중국의 오랜 역사에 비춰 볼 때 근대 100년의 시련은 시련도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비롯해 한 번 전란에 휩싸이면 몇 백 년을 견뎌내야 했던 것에 비해 100년은 긴 기간이 아니다. 숨 가쁘게 현대를 사람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통찰해야하는 이유를 들려주는 말인 것만 같다. 

그가 정년을 앞두고 말년에 단 한권 펴낸 수필집 제목은 '한 송이 들꽃과 만날 때'다. 학창시절 은사들에 대한 회고로 시작하는 1부는 해방을 전후한 어린 시절과 중학·대학시절, 그리고 강사 시절을 거쳐 교수 시절까지를 진솔하게 담고 있다. 특히 광주서중 중학 시절 맞은 해방 공간은 그에게 '학문적 빅뱅'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사화', '세계사 교정', '어머니', '소련 기행 수정', '사회사상가 평전', '역사 연구'…. 그는 이 시기에 다양한 세계관과 철학을 섭렵,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2부에는 92년 회갑을 맞아 자비로 간행해 학계 일각에서 화제를 모은 '민두기 자편연보략(自編年譜略)' 등이 실려 있다. 

평생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서생(書生)의 삶은 담백하기만 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중국사 그리스철학 인류학 그리고 마르크스 엥겔스 서적을 밤새워 섭렵했던 이야기 속엔 어려운 시절일수록 학문의 빛이 진정 발한다는 그의 올곧은 신념이 잘 배어있다. 다행히 인근 목포대학교에 2001년 유족들이 기증한 교수의 손때가 묻은 1만여 권의 장서를 바탕으로 '민두기 기념문고'가 설립되어 해마다 학술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지만 정작 그의 고향에서는 이렇다 할 관심이 없는 듯하다. 우리고장이 낳은 석학의 삶, 그리고 근현대 동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지적편력을 보여주는 저작물들이 고향에서 더 많이 읽혀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김원자 본지 편집고문, 호남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