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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하)
⑮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하)위대한 생애는 위대한 예술로만 살아난다2012년 10월 15일 (월) 14:57:20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현재는 하드웨어가 중시되었던 시대에서 소프트웨어가 중시되는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다. 내년에 개관될 양 지자체의 기념관은 외양을 가꾸는 것보다 이순신관련 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일에 더 치중해야 한다. 사진은 내년에 개관될 명량대첩 승전광장과 전망대 조감도. 최근 필자는 가까운 친구가 번역한 "해협"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강제징용을 다룬 소설로, 하하키기 호세이란 의사이면서 소설가인 일본인이 쓴 책이다. 당시의 상황이 리얼하고 아프게 와 닿아서 왜 이런 소설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는지, 이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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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상)
⑮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상) 땅끝해남의 인물자원 2012/09/28 14:33 수정 삭제http://keiwj.blog.me/90153278673전용뷰어 보기⑮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상)2012년 09월 21일 (금) 16:11:54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명량대첩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있던 나라를 구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이순신장군과 전라도 민초들의 구국정신을 기리는 명량대첩축제가 올해도 10월 5일부터 해남우수영일원에서 열린다. 사진은 지난 명량해전 재현 모습. 남도의 가을 대표축제인 명량대첩축제가 곧 시작된다. 초요기를 올려라, 약무호남제례, 우수영 강강술래 공연, 수문장 교대식, 난장콘서트, 문화공연, ..
2014.01.08 -
⑭ 충의공(忠毅公) 이유길
⑭ 충의공(忠毅公) 이유길삼산면 충리(忠里), 충신의 고향이라서 충리인가2012년 09월 10일 (월) 14:30:02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삼산면 충리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이유길 장수유허비. 군인의 생명인 '충의 정신'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조선의 선비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남의 나라 전쟁인데 출정 시 맹세한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하나로 목숨을 바친 우직하고 용맹무쌍한 장수가 있다.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1576-1619)은 해남군 삼산면 충리 에서 거주하며 무예를 닦고 평안도(平安道) 영유(永柔) 현령으로 있을 때 명(明)나라의 파병 요청이 있어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하고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병하였다. 함길직도(直搗)의 적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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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정운(鄭運)장군
⑬ 정운(鄭運)장군불멸의 신화 … '임진왜란 또 하나의 영웅'2012년 08월 27일 (월) 11:31:25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정운(1542~1592)은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난 조선중기의 무장으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창진이다. 7세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는 글씨를 써서 벽에 붙이고 또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빼어들고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어 싸우기로 결심하더니 28세에 무과에 급제해 북방의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웅천현감, 삭녕군수를 거쳐 임진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하여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날리다가 부산포 싸움에서 50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임진란 초기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그는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
2014.01.08 -
⑫ 법정(法頂)스님
⑫ 법정(法頂)스님'무소유'철학자의 생가복원, 뭔가 달라야한다2012년 08월 03일 (금) 11:41:12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법정스님이 불교계뿐 아니라 우리사회에 남긴 유산은 참 많다. 탐욕의 사회를 질타하듯 그는 '무소유'를 강조했으며 세상과 소통하듯 가끔 써낸 글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와 노래였다, 마하심보살이란 법명을 가진 후배가 최근 교통사고로 비명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늦게 배운 서툰 자동차운전이 원인이었다 한다. 그 후배로 인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시던 법정을 뵈러간 적이 있고 근 삼십 년 가까이 절이나 스님들의 생활을 엿보며 불교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되었는데 후배가 떠났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임종이 '다 버리고 떠난다'는 말임을 새삼 깨닫는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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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산대사가 남쪽 대흥사로 온 까닭은?
11. 서산대사가 남쪽 대흥사로 온 까닭은?2012년 07월 20일 (금) 14:58:26해남신문 기자 hnews@hnews.co.kr 표충사는 유교식 사당으로 서산대사와 제자 사명당, 처영대사를 함께 모신 곳이다. 1789년 정조 임금이 표충사 편액을 금물로 직접 써서 하사할 만큼 국가적 예우가 컸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관행을 없애버린 후 현재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표충사를 이순신사당에 버금가는 국가 기관으로 성역화해서 문화재청 직속 기관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다. 서산대사 휴정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본관은 완산(完山), 안주(安州) 출생으로 속명은 최현응(崔玄應), 법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이다. 1534년(중종 29년)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
2014.01.08